결희씨가 성형외과 레지던트에 지원했을 당시, 그의 경쟁자 전원이 남자였습니다. 한 교수는 유일한 여자 지원자가 못마땅했던 나머지 결희씨의 면접 점수를 ‘0점’ 처리했죠.

칼을 드는 외과 의사의 세계는 기본값이 남성입니다. 그 세계에 들어오는 여성은 어디까지나 희귀한 변수로 취급되곤 합니다. 여자의 직업적 야망은 모조리 ‘욕심’으로 간주되던 분위기 속에서도 결희씨는 물러나지 않습니다. 누구도 문제 삼을 수 없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바늘귀 같았던 합격문을 통과했죠.

“실은 내과에 가려고 했어요. 인턴 할 때도 내과를 준비했지 성형외과에 갈 생각은 없었죠. 의사의 일을 크게 두 개로 나누면 내과와 외과예요. 비유하자면 내과는 머리를 쓰는 문(文)의 영역, 외과는 몸과 도구를 쓰는 무(武)의 영역으로 여기는데요. 누가 그렇게 정해준 것도 아닌데 저는 전자에 해당한다고 생각했었죠.

생각이 바뀐 건, 오직 시집에서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어요. 돈이라도 많이 벌어오면 좀 덜해질까 싶어서. (웃음)

근데 참 신기한 게 일이란 해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건가 봐요. 나는 서전(surgeon·외과 의사)의 일이 너무 잘 맞는 사람이었던 거죠. 외과 의사들을 보면 분명히 타고난 손이 있거든요? 손의 감각이 유달리 뛰어난 사람. 근데 그건 이 일을 직접 해 보기 전까진 알 방법이 없어요. 저 역시 전문의 수련을 하면서 알았어요. ‘이게 내 천직이구나’.

이혼하자마자 레지던트를 시작했는데 마음이 지옥 같아서 매일 울었거든요? 회진 돌기 전에 울고, 돌고 나서 울고 그러는데 수술방에만 들어가면 모든 것을 잊어버려요. 그땐 그런 힘으로 버텼던 거 같아요.”

‘이 일이 내 천직이다’라는 각성은 대개 두 가지 조건이 만나 스파크를 일으키는 순간 찾아옵니다.

첫 번째 조건은 ‘이 일이 요구하는 자질’이고 두 번째 조건은 ‘내가 가지고 있는 소질’입니다. 내 업(業)이 요하는 것과 내가 가진 가장 강한 힘이 맞아떨어질 때, 대체되지 않는 자신의 쓸모를 실감하게 되는 거죠.

성형외과의 일엔 하나의 ‘골드 스탠더드’가 없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환자를 10명의 의사가 대하면 10가지 다른 수술 방법이 나오죠. 그만큼 의사 개인이 발휘하는 창조성과 독창성이 중요한데요. 바로 그 변칙성이야말로 결희씨가 가장 즐기는 것이었다고 해요.

고정된 풀이법이 없는 문제를 내키는 대로 풀어 온 그는 커리어 패스 역시 주변의 의사들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확장합니다. 전문의 과정을 마치자마자 미국 유학을 결심하는데요.

한국에서 함께 공부했던 동문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병원은 애초 후보군에 넣질 않았죠. 일단 학술 전문 사이트를 띄워 놓고 관심 있는 분야의 키워드를 검색해 넣었습니다.

그가 배우고 싶었던 건 유방암으로 인해 가슴을 상실한 환자들을 위한 ‘가슴 재건 수술’ 방법이었는데요. 그 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성과를 가진 곳은 다름 아닌 하버드대학교의 BIDMC 병원이었습니다.

곧장 하버드에 메일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곳에서 배우고 싶습니다. 펠로*로 받아주세요.’

구인 광고를 보고 구직을 한 게 아니라 냅다 ‘구직 의사’부터 내질러버렸던 거죠. 강력한 뜻만 있다면 길이란 건 없다가도 생기는 법, 몇 번의 화상 면접을 거치고 가뿐히 합격한 그는 곧장 가방을 챙깁니다.

당시 결희씨의 나이가 서른둘, 그때까지 미국 땅 한 번 밟아본 적이 없었죠.

*펠로(fellow) : 임상강사,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후 약 1~3년간 세부 과목을 수련받으며 병원 실습을 도는 의사.

“미국에 가기 전까지 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성소수자를 만난 적이 없었어요. 아니다. 당연히 만난 적은 있었겠죠. 내가 몰랐던 것이었을 뿐.

미국에 가니 달랐어요. 같이 일하는 동료 중에도, 진료실에서 만나는 환자 중에도 심심치 않게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밝히는 이들이 있었죠. 물론 나도 거기에선 소수자였기 때문에 그게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고요.

한번은 이런 경험이 있었어요. 함께 일하는 동료가 너무 괜찮은데 애인이 없는 거예요. 당연하다는 듯이 물었어요. ‘넌 어째서 여자친구가 없어?’

그로부터 한 1년쯤 지난 뒤, 그의 집에 초대받았는데 자신의 파트너를 소개하더라고요. 난 사실 게이였다면서. 제가 동아시아에서 온 여성이니 자신의 커밍아웃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세계관이 재편되는 경험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에게 젠더(gender)를 이해하는 분류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뿐이었는데 보스턴이라는 역동적인 공간은 그 단일한 분류로는 설명되지 않는 곳이었죠.

생각해 보니 보스턴만이 특별한 공간일 리 없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죠. 한국에서 사는 32년 동안 단 한 번도 퀴어(queer)를 만날 수 없었던 건, 그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요.

미국에서 지낸 시간은, 의사로서뿐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각이 넓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일할 때 처음으로 의료 봉사를 갔어요. 누군가를 돕겠다는 공명심보다 낯선 환경에 나를 노출시켜보고 싶다는 생각이었죠.

콜롬비아에서 2주 동안 화상 환자들, 선천성 기형을 타고난 아이들을 수술하고 돌보면서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했어요. ‘아, 내 기술이 절실히 필요한 곳에서 일한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콜롬비아에서 돌아오자마자 ‘국경없는의사회’에 가입했어요. 한국인 출신으로는 유일한 성형외과 의사였죠.”

봉사자 중 상당수는 회의감과 우울에 시달렸습니다. 한 명을 돌보고 있는 사이 수십 명의 부상자가 물밀듯이 밀려들어왔죠. 고쳐내고 복원하는 속도보다 파괴되는 속도가 더 압도적인 상황. 모두가 무력감을 느끼는 가운데, 결희씨의 생각이 다다른 곳은 무력한 체념이 아니라 ‘겸허한 각성’이었습니다.

“의사의 일이 세상을 바꾸는 데 충분히 일조할 수 없다면, 나는 의사가 하는 일의 경계를 넘어가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의료 접근성이 낮은 이들을 직접 발견하고, 다가가고,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성별확정수술을 한 건 그로부터 몇 년 후인데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이 저를 성소수자 진료로 이끈 운명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어느 한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면, 그간 관통해 온 모든 경험이 훗날 일어날 일들의 복선처럼 여겨지는 때가 있어요. 결희씨는 ‘세상을 바꾸려면 의사의 일을 넘어서야 한다’는 이때의 깨달음이 머지않은 미래에 그를 ‘성소수자 앨라이*’로 만든 씨앗과도 같았다고 말합니다.

*앨라이(ally) : 성소수자 차별을 반대하는 뜻에 함께하며 연대하는 자.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 지친 기색으로 결희씨 앞에 도착한 이 환자는 가슴을 없애달라 했습니다. 지정 성별은 여성이었지만 남성으로 트랜지션 중인 FTM 트랜스젠더였죠.

트랜스젠더의 탑(top) 수술은 유방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유방 절제술이나, 유방의 크기를 줄이는 유방 축소술과는 다릅니다. 가슴 조직을 도려내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흉부에 가깝도록 최종적인 모양을 디자인하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트랜스 남성의 탑 수술도 가슴 수술의 일환이기 때문에 공부하고 준비해 둔 자료가 있었어요. 언젠가는 이 수술을 원하는 환자가 오겠지 생각했었나 봐요.

상담하면서 이름을 물었는데, 너무나도 여성스러운 이름인 거죠. 그래서 재차 물었어요. ‘주민등록상의 이름 말고, 불리기를 원하는 이름이 있어요? 머지않아 성별 정정도 할 텐데 생각해 둔 이름은요?’ 이미 정해둔 이름이 있더라고요. 차트에 그 이름을 적었어요. 우리 직원들한테도 일러뒀죠. 이분이 오시면 꼭 이 성함으로 불러달라고.

고작 이름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할까 싶을 수 있어요. 남들이 보기엔 대수롭지 않아 보여도, 당사자한텐 그렇지 않아요. 내 외모는 이미 남성인데, 여성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면 남들이 내 정체성을 눈치채지는 않을까 걱정될 수밖에 없거든요.”

그 환자에게 결희씨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지’ 물어준 첫 번째 의사였습니다. 평생 몸에 맞지 않다 여겼던 성별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래서 내내 불편하기만 했던 이름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진짜’ 이름을요.

이름에서 시작된 신뢰는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며 한층 두터워졌고, 폐쇄적인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입소문의 태풍’을 만들기 시작했죠. 그렇게 첫 번째 환자는 두 번째 환자를, 세 번째 환자를 불러왔습니다. 수술 횟수가 빠르게 늘자 병원도 놀랐죠.

“병원 대표원장님이 따로 저를 불러서 말씀하시더라고요. ‘이 수술은 비보험 진료라 비즈니스적으로도 블루오션이다, 이렇게 숨은 수요가 많을 줄 몰랐다’ 그러면서 성소수자를 위한 탑 수술 광고를 한번 해 보자는 거죠.

그런데 병원 이름은 싹 빼고 제 이름만 넣으라는 거예요. 어처구니가 없었죠. 성소수자들을 위한 병원이라 알려지는 게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성소수자 환자군을 쏠쏠한 돈벌이 수단, 그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대하지 않는 병원의 태도에 실망한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만뒀습니다.

일을 쉰 틈을 타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을 다녀온 다음, 두 번째로 선택한 병원은 압구정 한가운데에 있는 대형 성형외과였습니다. 환자들은 일제히 그를 따라왔어요. 이곳에서 다른 건 중요치 않았어요. 의사 개인에게 중요한 건 철저히 ‘수술 숫자’뿐, 그 외의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깔끔한 환경이었죠.

성소수자 수술 건이 많아질수록 결희씨뿐 아니라 그와 함께 일하는 코디네이터와 상담 실장들 역시 ‘퀴어 프렌들리’한 태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유니폼의 왼쪽 가슴엔 퀴어 앨라이임을 상징하는 무지갯빛 배지가 달렸고, 상담 차트에 주민등록상의 이름이 아닌 환자가 원하는 이름을 적는 것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졌죠.

“그러다가 코로나19가 터졌죠. 강남의 모든 성형외과가 휘청거렸어요. 하늘길이 막히면서 외국인 환자들이 사라지니까 수입은 반 토막의 반 토막 아래로 떨어졌죠. 대형 병원은 페이 닥터의 수를 줄였어요. 제가 다니던 병원은 일주일에 4일만 출근하라며 월급을 줄였죠.

성형외과 의사로 보면 위기인데, 성소수자를 진료하는 의사로서 보니 기회인 거예요. 국내 트랜스젠더 중 대부분이 성별확정수술을 하기 위해 태국으로 나가거든요. 국내엔 전문적인 다학제 진료를 기반으로 성별확정수술을 할 수 있는 병원이 없으니까. 근데 이 사람들이 나갈 수 없게 된 거죠.

오케이, 때마침 4일만 나오라니까 시간이 남잖아요? 나머지 이틀은 제가 레지던트로 근무했던 강동성심병원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목적은 하나였죠. 종합병원 안에 성별확정수술만을 전문으로 하는 팀을 만들어야겠다.”

성소수자들의 의료 서비스 수요는 ‘없는 수요’로 취급되고 있지만 사실은 ‘숨겨진 수요’에 가깝다고 합니다. 국내 트랜스젠더의 대부분이 태국으로 ‘원정 수술’을 떠나기 때문에 국내 의사들은 이 분야의 수술을 배우지 않아요. 환자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반대로 트랜스젠더들은 ‘국내에선 퀴어 프렌들리한 병원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호르몬 치료를 받으려면 정신의학과 전문의의 진단서를 받아야 하는데, 이 짧은 과정에서도 수치심과 당혹감을 느끼는 경우가 허다하니까요.

수요가 가시화되지 않으니 공급은 사라지고, 공급이 부족하니 서비스의 질은 하락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갇혀있는 셈입니다. 결희씨가 원한 건 이 답답한 고리의 한가운데를 끊어내는 것이었죠.

성별확정수술의 아시아 허브를 만들겠다는 거창한 포부를 내걸고, 국내 최초 대학병원 내 LGBTQ+센터는 출발했습니다.

결희씨는 직접 비뇨기과, 산부인과, 내과, 정신건강의학과 등을 돌며 동료 의사들을 설득했습니다. 이미 자기 전공 분야가 확실한 이들에게 기상천외한 변수가 난무하는 미지의 도전을 권유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죠.

응원은 하겠지만 함께 하긴 어려울 것 같다는 반응이 반, 흥미로워 보이나 망설여진다는 반응이 반. 지나가는 어떤 이는 ‘선생님은 그런 수술 하다 아마 지옥에 갈 거예요’라는 폭언을 면전에 내뱉기도 했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센터 문을 열었는데 첫 6개월 동안은 환자가 아예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성소수자 부모 모임’이라는 단체를 찾아갔죠. 자녀의 몸과 마음을 가장 걱정하는 이들은 아마 부모들일 테니까요. 내 아이가 트랜스젠더라는 걸 어찌어찌 알게 됐어, 인정하고 지지하기로 마음은 먹었어, 그러면 그다음은? 막막한 거죠.

성별 정정을 위해 수술이 필요하다는데 그걸 어디서 할 수 있는지, 수술 과정은 어떻고, 회복엔 얼마나 걸리는지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는 곳이 없으니까. 그래서 제가 갔어요. 누구도 저한테 먼저 와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모임이 열릴 때마다 빠짐없이 자진 출석해 상담을 하러 다녔죠.”

한마디로 의사가 발로 뛰는 영업을 한 셈이죠. 그곳에서 결희씨가 돌린 명함을 받고 병원에 찾아온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첫 번째 환자, 두 번째 환자가 거쳐가자 예전처럼 입소문이 도는 건 순식간이었죠.

국내 트랜스젠더 10명 중 4명이 자살을 시도합니다.

누군가는 이 수술이 ‘생사와는 관계가 없는’ 수술이라 말할지 몰라도 결희씨에겐 그렇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장 중요한 조각을 잃어버린 채로 삶이라는 퍼즐을 고되게 맞추는 이들에게, 그가 하는 일은 잃어버린 조각을 함께 만들어 주는 것. 상처투성이인 채로 그 앞에 도착한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 역시 그의 일일 수밖에 없어요.

오랜 시간 비가 내려 물러진 마음의 땅을 단단히 굳혀야 그 위에 새로운 나무를 심을 수 있으니까요. 마음의 짓무름이 너무 심한 이들을 돌려보내는 것 역시 그의 몫입니다.

“환자와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눠요. 어디에 사는지, 누구와 살고 있는지, 성적 지향은 어떤지, 커밍아웃을 한 상대로부터 얼마큼의 심리적 지지를 받고 있는지, 현재 자신의 성정체성에 부합하는 젠더로 사회에서 생활하고 있는지 빠뜨리지 않고 물어야 해요. 그게 다 수술 방법에 영향을 미치거든요.

상담을 하다 보면 자살 충동이 있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경우엔 과감히 수술을 미뤄야 해요.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체적으로 큰 스트레스가 가해지면 위험할 수 있거든요.”

종종 환자들은 결희씨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성별 불일치감* 진단을 받기 위해 만났던 정신과 의사에게서 들었던 말들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고.

그런 하소연을 듣고 나면, 자신의 말 한마디가 환자에게 어떤 크기와 충격으로 가닿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배가 되죠.

어떤 동료 의사들은 ‘환자가 상처받을까 봐 아무 말도 안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침묵 역시 환자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길 수 있다는 걸 잘 아는 결희씨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자꾸 환자에게 말을 겁니다.

헛디딜지 모르니 아예 발길조차 내딛지 않는 것보단 휘청거릴지언정 일단 걸어나가 보는 게 더 낫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

*성별 불일치감 : 태어날 때 부여받은 성과 정신적 성이 달라 트랜스젠더 당사자가 겪는 정신적 불편감과 고통.

“하루는 어떤 환자분이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선생님, 저는 어렸을 때 제 몸에 남자 성기가 없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직 내가 어려서 그런가 보다.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면 점점 자라나겠지 싶었어요.’

저는 수술을 하면서 ‘없는 것을 만들어 드린다’고만 생각했었거든요? 환자한텐 그게 아니었던 거죠. ‘내 몸에 당연히 원래 있었어야 할 것을 복원하는’ 개념이었던 거예요.

아… 그제야 이 힘든 수술에 뛰어드는 마음을 알 것 같았어요.”

결희씨는 찾아오는 환자에게 일일이 개인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고, SNS의 메시지 창을 활짝 열어 둡니다. 자신의 수술대를 거쳐 간 환자를 집으로 초대해 직접 밥을 지어 해 먹이고, 목욕탕에 가기 두렵다는 환자의 손을 끌어 같이 사우나에 가주죠.

종합병원 교수의 하루가 10분 단위로 쪼개져 굴러간다는 걸 아는 주변의 의사 동료들은 ‘어떻게 그렇게까지 하냐’고 말해요. ‘하다 보면 별거 아니다’라며 너스레를 떨고 말지만, 스스로도 알아요.

사서 하는 이 모든 고생이 환자 각각의 삶에 느끼는 가볍지 않은 ‘책임감’ 때문이라는 걸요.

“트랜스여성(MTF) 환자 중에 가슴을 작게 만들어 달라는 분이 있었어요. 직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남성으로 지내야 하기 때문에, 너무 눈에 띄면 안 된다는 거죠. 회사 사람들이 알아보면 안 된다, 여성성을 표현할 수 있을 정도면 된다고요.

수술을 잘 마쳤고, 경과도 참 좋았어요. 그렇게 퇴원까지 마쳤는데 이분이 저를 계속 찾아오시는 거예요. 상담 예약까지 하고 오셔서 아무 용건 없이 시시콜콜한 대화만 나누다 돌아가세요.’

제가 어느 날 물어봤어요. ‘우리 자주 보는 건 좋은데, 상담 오시면 진료비도 내셔야 하잖아요. 더 이상 제가 해드릴 게 없는데 어떻게 하죠?’라고요. 그랬더니 ‘선생님, 저는 이 병원에 올 때 유일하게 여자일 수 있어서 여기 오는 게 너무 기다려져요’라는 거예요.

들어보니 이 분은 사정상 직장에선 정체성을 드러낼 수가 없어요. 그러니 이 병원에 저를 만나러 올 때에만 편안하게 ‘여자’일 수 있는 거예요. 치마도 입고, 가슴도 드러내고, 화장도 하고. 오직 여기에 올 때만 여자로 살 수 있는 거죠.”

결희씨는 그때 알았다고 합니다. 성별확정수술은 이들에게 맞는 몸을 찾아 주는 ‘시작’일 뿐, 이들이 바뀐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차원은 병원 밖에 있다는 사실을요.

인간의 삶엔 사람, 장소, 그리고 환대가 필요합니다. 한국 사회의 트랜스젠더들에겐 이 세 가지 조건이 모두 허락되지 않아요. 자신의 존재를 오롯이 인정받는 경험, 타인에게 조건 없이 환대받는 경험, 그렇게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를 부여받는 경험을 가져본 적이 없죠.

*출처 : 김현경 저, <사람, 장소, 환대>

결희씨는 자신의 진료실이 그들의 ‘장소’가 되기를, 또 자신의 존재가 그들의 ‘사람’이 되기를, 필요한 때에 안전하게 받은 의료 서비스가 그들에게 ‘환대’로 느껴지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이 모든 조건이 자신의 진료실 밖으로 뻗어나가기를 바라죠.

“실은 마음이 무지 급해요. 성소수자의료연구회 활동을 하는 것도, 유튜브를 통해 LGBTQ를 위한 의료 지식을 알리는 것도, 제가 치료한 환자들을 병원 밖에서 만나는 것도… 정말 하나도 포기를 못 하겠거든요.

일이 많은데, 나도 아는데, 도무지 천천히 갈 수가 없어요. 왜냐면 저는 보이거든요.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은 만큼, 제가 이 일에 붓는 양만큼 뭐가 조금씩 바뀌어 있는 게 보여요. 그래서 속도를 줄일 수가 없는 거죠.”

“성별확정수술은 반드시 건강 보험의 적용을 받을 거예요. 성별 정정 절차도 지금보다 훨씬 쉬워질 겁니다. 성소수자 진료를 보는 의사가 더 많아질 거예요.

물론 세상이 바뀌는 속도가 기대만큼 따라주지 않을 순 있어요. 그래도 저는 확신해요. 이건 속도의 문제지 방향의 문제가 아니다.”

성소수자들을 위한 진료실, 대한민국 최초의 대학병원 LGBTQ+센터. 이 척박한 맨땅에 도착한 것을 후회하진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인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조언을 구하는 선배가 그런 말을 하신 적 있어요.

‘결희야, 세상에 좋은 선택은 없다. 그만큼 나쁜 선택도 없다. 선택을 고민하고 있다면 어떤 쪽을 택하든 조건은 비슷하다는 거다. 그러면 무엇이 좋은 선택을 만드는 거냐고? 그건 네가 그 선택에 어떻게 임하는지에 달려 있어.’

전 한 번 선택하면 뒤돌아보지 않아요. 거기에 모든 것을 걸어요. 목표는 이상주의자지만, 과정은 현실주의자처럼. 딱 10년만 일찍 태어났어 봐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많았을까? 아닐 것 같거든요. 이렇게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시대에, 이렇게 열심히 일할 수 있어서 나는 참 행운이에요.”

그와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사명감(使命感)’이라는 단어에 대해 떠올렸습니다.

돈이 종교가 된 시대에 너무나도 낡고 볼품없어져 버린 단어죠. 사전을 뒤져보면 ‘사명’이란 맡겨진 임무를, ‘사명감’이란 주어진 임무를 잘 수행하려는 마음가짐을 뜻합니다. 거창한 수식 없이 참으로 수수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이 수수한 가치에 진심과 양심을 다하는 이들은 턱없이 부족하죠. 날이 갈수록 세상의 공기가 따가워지는 건 바로 그 때문일 겁니다.

결희씨는 인터뷰하는 내내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도 환자의 몸을 ‘고친다’고 표현하지 않았어요. 언제나 ‘돕는다’고 말했죠. 그가 선택한 단어들에서 저는 이런 뜻을 읽었습니다.

‘나 혼자 세상을 움직여 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세상이 움직이는 데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난 그 일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