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06
“모두가 선망하는 자리를 따냈는데,
황금 감옥에 제 손으로
저를 가둔 느낌이었어요.
그때 알았죠, 제가 갈망하는 건
쾌적하게 정돈된 궁전이 아니라,
흙탕물이 질척거리는
씨름판이었다는 사실을요.”
- 오늘의 커리어 포인트
-
- 나홀로 영국 유학
- 외교부 인턴
- 서울대 행정대학원
- 유네스코 컨설턴트
- OECD 정책분석관
- OECD 테뉴어 버리고 퇴사
- 폴리테크 스타트업 CODIT 창업
- 오직 커리업에서, 오늘의 뷰 포인트
-
- 전세계를 종횡무진 누비다
- The only Korean woman in OECD
- ‘인간 개조’의 여정, CEO가 되다
OECD라는 황금 궁전을 깨고, 스타트업 진흙탕에 뛰어들다
25세의 아시아인 여성. ‘백인 남성 엘리트’가 기본값인 OECD에서 이 사람의 정체성은 마이너리티 그 자체였습니다. 어디를 가나 의심으로 가득 찬 시선이 따라다녔죠. ‘네가 뭔데 그 자리를 차지하고 서 있느냐’고.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선 언제나 특별히 빼어나야 했습니다. 일반적이지 않은 자격의 사람은 일반적이지 않은 수준으로 뛰어나야 겨우 ‘이례(異例)적 케이스’가 될 수 있으니까.
이 사람, 정지은씨의 커리어 패스는 줄곧 그랬습니다. 누가 먼저 닦아 놓은 탄탄대로를 걸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온몸에 흙먼지를 묻혀가며 제 손으로 다리를 놓았죠. 건너온 다음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도록 제 손으로 불태워 버렸습니다.
황금 궁전이나 다름없었던 꿈의 직장 OECD를 버리고 난생처음 스타트업판에 뛰어들었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우아한 엘리트들의 표백된 세계를 벗어나 난장판의 ‘진흙탕’과 다름없는 창업 세계에 떨어져도 ‘난 살아남을 수 있어’라는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여태껏 그렇게 가시밭길의 가시를 꺾으며 걸어왔으니까.
자신만의 궤도를 맨땅에 헤딩하며 개척한 퍼스트 펭귄의 커리어 이야기, ‘맨땅 브레이커’의 6호 인터뷰이는 폴리테크 스타트업 ‘코딧’을 이끌고 있는 정지은 대표입니다.
Chapter1.궁극의 ‘독기캐’, 남들에겐 당연한 게하나도 당연하지 않았다
#S1 어떤 비범한 중학생의 질문
오지선다형 문제의 정답은 3번,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생각하는 답은 4번. 어지간한 중학생이라면 “좀 억울해도 이게 답이라는데 어떡해” 하고 넘어갔겠지만 이 소녀에겐 택도 없었다. 출제자를 찾아가 끈질기게 물었다. ‘우리가 배운 대로라면 4번도 답이에요. 선생님, 이렇게 알려주셨잖아요.’ 끝까지 묻고 캐서 결국은 4번도 답이 되게 만든다.
열다섯의 지은에게 학교라는 세상은 온통 ‘납득이 가질 않는 곳’이었다. 끊임없이 외워서 욱여넣고, 채점이 끝나면 모조리 털어 폐기 처분하는 기묘한 반복이 ‘배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
‘이게 맞아요? 이게 배우는 거예요?’ 그가 물으면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지은아, 질문 좀 그만해.’ 남들은 묻고 따지지 않는 것들, 원래 그런 것이라 여기는 것들을 그는 한 번도 당연히 여기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겼다. 자꾸 묻고 따졌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그의 뺨을 내려쳤다. 동급생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질문을 해서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23년 전엔 그게 흔한 일이었다.
지은씨는 부모에게도 쉬운 딸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대학부터 가서 생각하면 안 되겠느냐”는 구슬림도 통하지 않았죠.
절대로 중간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조건을 1번으로, 반드시 현지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조건을 2번으로 내걸어 직접 부모님과 합의까지 본 그는 제 손으로 짐가방을 싸기 시작합니다.
혼자 유럽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고, 그렇게 난생처음 영국 땅에 떨어지죠. 당시 지은씨의 나이는 열일곱이었습니다.
유학 생활은 한마디로 ‘박살이 나는’ 경험이었다고 해요. 자신 있었던 영어는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죠.
주말이면 학생들이 모조리 빠져나간 국제학교 기숙사에 혼자 남겨졌습니다. 옆자리 친구에게 말 한마디 붙이는 것도, 텅 빈 기숙사를 지키며 월요일을 기다리는 것도 괴로웠죠.
눈물 바람에 당장 돌아오고 싶다며 부모부터 찾아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였지만, 열일곱 살의 지은씨가 가장 먼저 한 것은 한국에 있는 부모님과의 연락을 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영어가 들릴 때까지 한국어로는 말하지도 듣지도 쓰지도 않는다는 독한 원칙을 세운 겁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이미 불타 없어져 버렸다고 생각했죠. ‘여기서 살아남지 않는 이상, 다른 길은 없는 거다.’
“얼마나 절박했냐면 교감 선생님을 직접 찾아가 설득했어요. 다른 수업을 빼고 저학년 영어 수업으로 채워 달라고.
전 10학년이었지만, 언어가 한참 모자라니 동급생들이 듣는 모든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거든요. 규정상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래요. 계속 찾아가서 끈질기게 매달렸어요. 이렇게 안 하면 난 이 학교 더 못 다닌다고. 결국 예외가 허용돼서 저는 영어 수업만 4개를 듣게 됐죠.
기숙사 학교는 밤 10시면 불이 다 꺼져요. 유일하게 불이 켜지는 곳은 샤워실이죠. 처음엔 샤워실 가서 공부하다가 나중엔 건전지를 갈아 끼울 수 있는 손전등을 샀어요. 그거 켜고서 새벽 4시까지 공부했죠. 딱 3개월이 지나니까 그제서야 말이 조금씩 들리더라고요.”
여기서 더 놀라운 건, 그로부터 1년 후에 학생회장이 됐다는 겁니다.
선거운동을 도와 달라며 친구들에게 말을 걸었을 때, 그들은 ‘너의 장래 희망을 응원한다’며 엉뚱한 대답을 했죠. ‘프레지던트(president)가 되고 싶어’라는 그의 말을 ‘언젠가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거였습니다. ‘school president’(학생회장)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거죠.
‘아니 네가 도대체 어떻게?’라는 시선이 파다했지만, 그는 같은 학교를 10년 이상 다닌 다른 친구들을 제치고 당선됐습니다. 자신보다 어린 학년의 친구들과 함께 영어 수업을 들으며 두루두루 ‘표심’을 살펴 놓은 결과였죠.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영국 전역의 성적 우수 학생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우등생 커뮤니티 ‘내셔널 아너소사이어티’에 들어갔고, 대학 입학 당시엔 영국의 국제학교 졸업생들이 보는 ‘수능’인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 영어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습니다.
돌아가는 길을 불태워 버렸다는 절박한 결기가 엔진을 풀가동할 수 있는 연료가 된 셈이었죠.
10대 시절의 지은씨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무리 속에 섞어 놓으면 반드시 맨 앞에 가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 자신을 가혹하게 몰아세울 수 있는 셀프 엔진을 타고난 아이, 그 엔진을 쉬게 하는 법 없이 언제나 풀파워로 돌리는 아이.
도무지 힘 빼는 법을 몰랐던 10대 시절의 그는, 모든 순간 앞에서 ‘두 번째 기회는 없다’는 생각으로 달려들었습니다. 부모가 물려준 수저가 아니라 직접 찾아 든 삽으로 자기의 길을 개척했죠.
#S2 수억 원 연봉 뒤로 하고 월급 두 자릿수 외교부에 들어간 이유
런던의 한 명문대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고 졸업했다. 함께 공부한 동기들은 수억 원의 연봉을 보장하는 컨설팅 회사와 투자은행에 취직했다.
지은은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월 급여가 100만 원도 안 되는 외교부에서 인턴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난 부모님은 근심을 숨기지 않았다. 유학까지 다녀온 애가 도대체 저런 박봉을 받으며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며, 월급 두둑이 챙겨주는 그럴듯한 회사에 안착하지 않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 캐물었다.
의심 반, 걱정 반인 잔소리 속에서도 공공 부문(Public Sector)에서 일하겠다는 그의 고집엔 흔들림이 없었다. 남들이 뭐라고 하건, 스스로 설득된 결정엔 의심을 제기하지 않는 것. 그게 그만의 원칙이었다.
Contribution, 업생을 회고하는 지은씨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입니다.
‘기여’라는 뜻이죠. 지은씨에게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는가’, ‘얼마나 안정적인 복지를 보장받을 수 있는가’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했던 건 ‘내 쓸모는 무엇인가’, 더 나아가 ‘내 역량이 가장 뜻깊게 기여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였죠. 그에게 공공 부문은 한 명의 개인으로서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기업의 영향력은 제품을 산 소비자에게만 닿습니다. 정부의 영향력은 나라의 국민 전부에게 미치죠. 더 넓고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곳에서 그 힘에 상응하는 책임을 업는 것이야말로 그가 따르고자 하는 길이었던 겁니다.
지은씨는 외교부 인턴을 마치자마자 행정대학원에 들어갑니다. 한국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막상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선택지는 축소되고 또 축소됐습니다.
동기들이 생각하는 커리어 패스는 둘 중 하나였어요. 행정고시를 패스해 공무원 조직의 일원이 되거나, 정책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연구원이 되거나, 변주의 여지가 없는 ‘이지선다’였죠.
그런 와중에 의심은 커져갔습니다. 현직으로 일하고 있는 선배들을 만나면서 알게 됐거든요. 한국의 공직 문화에선 ‘상명하복’이 섭리처럼 여겨진다는 것, 누구도 중력의 법칙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듯, 이 수직의 질서를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러니 한 명의 공직자가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은 터무니없이 작았습니다.
또 한번 뭔가가 박살 나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모범생의 오류에 빠진 거였죠. 누구보다 빠르게, 누구보다 완벽하게 준비해 지름길로 들어선 줄 알았는데, 목적지부터가 틀린 거였어요. 돈도, 명예도 아닌 영향력을 쫓아왔지만, 정작 이곳에 그가 찾고자 했던 것은 없었습니다.
Chapter2.경쟁률 400:1의 OECD 공채, '영점 조절'의 힘으로 뚫다
#S3 좌충우돌 유네스코 입성기
‘소프트 랜딩(연착륙)이란 게 없는 팔자구나’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무방비의 상태로 맨땅에 메다꽂히면서 새로운 국면이 열렸다.
대학원 생활을 마쳐갈 때쯤 다음 기회도 그렇게 열렸다.
국제기구에서 인턴십을 하며 일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기적적으로 주어졌다. 단, 제네바에서 열리는 UN 회의에 참석해 직접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때는 12월,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해가 바뀌기 전까지 고작 20일.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의 바짓가랑이까지 붙잡았다.
그 간절함을 측은히 지켜본 누군가, ‘내 동료 중엔 크리스마스에도 일하는 별난 인간이 있다’며 메일을 보내 보라 했다. 그 길로 근처의 애플 스토어로 뛰어 들어가 진열용 컴퓨터 한 대를 차지하고 지원서를 써서 보냈다. 노트북을 챙겨 갈 정신조차 없었던 거다.
이듬해 1월 1일, 급하게 쓸어 담은 짐가방을 들고 파리에 입성했다. 그게 첫 직장 유네스코(UNESCO)에서의 시작이었다.
‘크리스마스에도 일하는 별난 인간’이었던 그의 첫 상사는, 유네스코의 유일한 북한인이었습니다. ‘근면성실’의 유전자는 민족적 DNA였던 것일까요.
두 사람은 시작부터 호흡이 잘 맞았죠. 지은씨는 유네스코의 교육 정책국에서 일하며 아프리카 나라들의 교육 시스템을 재건하는 일을 도맡았습니다.
처음엔 3개월짜리 단기 인턴이었지만, 그의 유능함을 알아본 동료들의 추천으로 정규직 일원이 되어 2년을 더 일했습니다.
한 달 중 절반은 유네스코 본사가 있는 파리에서 머물렀고, 나머지 절반은 아프리카 현지로 파견되어 그곳의 공무원, 교사, 학교 관계자들과 부대끼며 일했습니다. 현지인들과 ‘장벽’ 없이 소통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것은 불어*를 배우는 것이었어요.
*아프리카 중 상당 수 나라는 과거 프랑스 식민지였기 때문에 제1언어가 불어인 경우가 많다.
“언어도 언어지만, 이때 배운 가장 값진 커리어 스킬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었어요.
저희가 만든 전략을 아프리카 현지에 이식하기 위해선 제가 알고 이해한 것을 상대방의 수준으로 설명하는 능력이 필요했거든요. 살아온 배경도, 문화도 다른 외국인에게 내가 생각하는 바를 오류 없이 정확하게 전달한다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한 달에 한 번씩 출장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훈련이 되더라고요. 상대가 어떤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파악하고, 내가 원하는 걸 그들에게 ‘입력’하려면 어떤 방법을 써야 하는지 체득했어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파악하는 이 반사적인 감각은 2년 후, 그가 OECD에 지원했을 당시 400:1이라는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게 해준 키(key)가 됐습니다.
그의 경쟁자 중엔 옥스퍼드와 같은 세계적인 명문대에서 박사 학위를 딴 석학들이 즐비했어요. OECD는 국가별 할당제 없이 오직 ‘실력’과 ‘역량’으로만 사람을 뽑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교육을 받은 엘리트 백인 남성들이 주를 이뤘죠.
지은씨는 내세울 게 없었어요. 국내 대학 석사 출신이었고 국제기구에서 일한 경력도 겨우 2년, OECD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기준’을 겨우 충족한 상태였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지은씨가 한 것은 ‘OECD인들이 구사하는 언어’를 몸에 익히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지원한 분과에서 나온 리포트 10년 치를 프린트해 자신만의 교재로 삼았죠. 리포트 1개당 500페이지가 넘어가니까 수천 페이지 분량의 벽돌책이 여러 권 나왔습니다. 주야장천 들여다보면서 문장 이면에 놓여 있는 논리 구조를 분석했어요. OECD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어떤 구조로 사고하는지 샅샅이 해부한 겁니다.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비슷한 수준의 어휘력을 구사하는 것이야말로 OECD와 ‘통하기’ 위한 1번의 해법이었습니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느냐, 바로 ‘영점 조절(Zeroing)’*이었습니다.
*영점 조절(Zeroing)을 뜻하는 불어 ‘Visez Juste’는 ‘정확히 맞아’라는 관용어구로도 쓰인다. 주로 문제에 대한 확실한 솔루션을 찾았거나, 토론 중에 예리한 논리를 펼쳤을 때 그 적확함을 치켜세우는 용도로 쓰인다.
“두 가지만 생각했어요. 첫째, 내가 들어갈 위치가 어떤 위치인가. 둘째, 그 위치에 걸맞은 캐릭터는 무엇인가. Young Professional이라는 자리는 전문성을 요구하는 자리지만, ‘시니어’급의 자리는 아니에요. 제 역할은 어시스턴트(assistant)지 보스(boss)가 아니거든요.
내가 만약 함께 일할 후배 동료를 뽑는 팀장이라면 어떤 캐릭터를 원할까? 잘난 척하면서 ‘내가 제일 잘 알아’ 하는 사람은 불편할 거 같았어요. 근데 저와 겨루는 경쟁자들 대부분이 그런 캐릭터였거든요. 모조리 박사였으니까.
다른 지원자들은 면접 볼 때 ‘지적’을 했어요. ‘딴 데는 이렇게 분석하던데, 너네는 왜 이런 걸 생각 안 해본 거야?’라는 식으로. 저는 humble(자기를 낮추는)한 태도가 더 먹힐 거라고 봤죠. 제안하듯이 말했어요. ‘지금 버전으로도 좋지만, 이런 포인트를 넣으면 더 유용해질 것 같다.’
나중에 궁금해서 보스에게 물어봤어요. 나는 배움도 경력도 다른 후보들에 비해 훨씬 짧았는데 왜 나를 뽑았냐고. 가장 여기서 일할 준비가 잘 되어 있는 지원자였대요.”
사격 용어인 ‘영점 조절’은 총알이 떨어지는 지점인 ‘영점 거리’와 조준선을 일치시키는 작업을 뜻해요. 정중앙을 조준하고 쐈다고 생각했는데 총알이 왼쪽으로 쏠린다면, 오른쪽으로 ‘영점’을 조정해줘야 합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정중앙만 고집해서는 원하는 위치에 총알을 명중시킬 수 없어요. 총알이 어디로, 어떻게 떨어지는지를 파악해가면서, 쏘는 기준도 수정해야 합니다.
지은씨가 다른 후보자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었어요. 다른 이들은 ‘스스로 유유히 잘난 사람’이 되는 노선을 고수했지만, 오직 그만이 ‘한 번쯤 같이 일해보고 싶은 상대’가 되는 쪽으로 기준을 변경했으니까요. 영점을 수정할 줄 알았기에, 원하는 것을 제대로 겨냥할 수 있었던 거죠.
그렇게 지은씨는 한국인 역사상 최초로 OECD의 YP(Young professional)가 되었습니다.
Chapter3.그가 자기 손으로 만든 황금 궁전을, 자기 손으로 깨부수고 나온 이유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는 세계 여러 국제기구 가운데에서도 ‘싱크탱크’적인 면모가 강한 기구입니다. 회원국의 경제 성장을 돕기 위해 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다방면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보고서를 발간하죠.
처음엔 세계 최고의 경제기구에서, 세계 최고의 엘리트들과 일하고 있다는 자긍의 힘이 대단했습니다. 유능한 동료들이 도처에 있었고, 언제나 가진 것보다 높은 수준의 역량을 요구받았기 때문에, 힘든 만큼 재밌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희열은 첫 3년뿐이었어요. 4년 차가 넘어가자 어느 순간부턴가 이 일이 ‘성에 갇힌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회원국에 자료를 요청하면 1년도 더 넘은 데이터를 보내주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러니 보고서 자체가 과거형이 돼버리는 거예요. 그런 와중에 알파고가 등장하고, 인공지능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면서, 이런 생각도 들었죠.
세상의 속도는 이렇게나 빠른데, 난 대체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쓴 리포트를 누가, 또 얼마나 읽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왜냐. 그땐 OECD 안에서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삶이 너무 버거웠거든요.”
#S4 궁전인 줄 알았는데 감옥이었어
OECD의 자리싸움은 그 어떤 직장보다 혹독하다. 살아남기 위해 계속 자신의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 2년에 한 번꼴로 시험을 치르고 성과를 측정한다.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바로 짐을 싸야 한다. 그중에서도 정년 보장 제도인 ‘테뉴어 (tenure)’ 자격시험은 자리를 두고 벌이는 싸움 중 가장 치열한 전투다.
회사 근처에 민박집을 구해 밤새 일하다 쪽잠만 자고 다시 출근하는 게 평범한 일상이었다. 오랜 시간 떨어져 살았던 부모님이 와도, 식사 한 끼 함께할 짬이 없었다. 삶을 누려볼 겨를도 없이 젊음을 모두 일에 털어 넣어 테뉴어 자격을 땄을 때 우울감이 파도처럼 덮쳤다. 이 일을 30년을 더 해야 한다니, 끔찍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들 보기에 거창한 궁전, 그 빛 좋은 감옥에 갇혀버리고 말았구나.’
“테뉴어를 따고 나서 무슨 느낌이었냐면, Golden Cage(황금 감옥)에 제 손으로 저를 가둔 느낌이었어요.
정년 30년을 채우고 은퇴하는 선배의 기념식에 참석한 적이 있어요. 평생 본인이 OECD에서 쌓은 업적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감동적인 게 아니라 ‘저렇게 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보통 기념식은 오래된 성 같은 건물에서 하거든요? 저 사람의 인생은 이런 우아한 성 속에서 내내 편안하게 보호받았겠구나, 싶더라고요. 나도 여기서 30년을 보내면 저렇게 되는 건가 보다. 그 순간 제가 임계치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들었죠.”
지은씨는 그때 알았습니다.
자신이 갈망하는 건 쾌적하게 정돈된 궁전이 아니라, 흙탕물이 질척거리는 씨름판이었다는 사실을요. 미지수들로부터 철저히 격리된 무균실은 역동성을 갈망하는 그에게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평생 발목이 묶이겠다는 위기감이 들었죠.
Chapter4.CEO라는 새로운 인종으로자신을 개조하다
#S5. 한번 건너온 다리는 불태워버린다, 그게 나의 방식
OECD에 휴직계를 내고 한국으로 돌아와 창업의 기회를 보고 있을 때, 그의 SNS 피드에 불길이 치솟는 영상이 우르르 올라왔다. 프랑스에서 집을 빼며 세간을 맡겨둔 창고에 화재가 난 것이었다.
파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사라져버렸다. 이미 건너온 다리를 불태우라는 어떤 계시처럼 여겨졌다.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이 판에 올인할 수 없으니까.
돌이켜 보면 그의 인생은 언제나 퇴로를 박살 내며 나아가 왔다. 혼자 유학길에 올랐던 10대 시절에도, 한국인 최초 YP로 OECD에 입사했던 20대 시절에도. 다른 길에 대해 감히 상상하지 않았기에, 순도 100%의 독기를 품을 수 있었으니까.
이번에도 퇴로에 불을 붙일 차례였다.
2020년 6월 지은씨가 창업한 ‘코딧’은 규제와 관련된 모든 정책과 법안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서비스입니다. 상위법부터 조례까지 정부의 공식 문서로 존재하는 모든 규칙을 데이터로 수집하고 이를 인공지능으로 분석하죠.
서비스의 타깃은 주로 기업, 그중에서도 스타트업들입니다. 작은 회사들이 규제를 미처 파악하지 못해 사업을 접는 상황을 방지할 수 있게, 각자의 사업 아이템별로 최적화된 데이터를 제공해요. 이를테면 모빌리티 스타트업엔 도로교통법과 관련된 정보를, 음악 투자 스타트업엔 저작권과 금융 관련 법 정보를 맞춤형으로 보여주죠.
한국의 국회에서는 하루 평균 30건 이상의 법안이 새롭게 발의되고, 하루가 다르게 다양한 정치적 입장이 난립합니다. 그러니 꽤나 숙련된 정책 매니저에게도 규제 이슈를 정확히 파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코딧은 바로 그런 페인 포인트(pain point)를 파고든 서비스입니다.
지은씨가 처음으로 사업이란 걸 해보자고 결심했을 때, 그는 본인이 가장 ‘잘 아는 것’을 팔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세계적인 공공 기구에서 일하며 지은씨가 매일 같이 들여다보던 것은 정책과 법안 데이터였어요. 이것을 한데 모았을 때, 어떻게 쓰일지는 몰라도 ‘요긴한 물건’이 되리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죠.
모든 사업은 누군가에게 돈을 받고 뭔가를 파는 것입니다. 평생 사기만 했던 사람과 백 원, 천 원짜리라도 ‘팔아본’ 사람의 관점은 완전히 다릅니다. 사기만 했던 사람은 모를 수밖에 없어요. 마음을 여는 것보다 지갑을 여는 게 훨씬 더 어렵단 사실을요.
공공 부문의 연구 전문가에서 스타트업의 CEO가 된다는 것은 뼈와 살을 모조리 교체하는 수준의 ‘개조’였다고 합니다. 계급장 떼고, 명함발, 소속발 전부 다 빼고 맨몸으로 시장과 맞붙는 느낌이었죠. 완전히 다른 종(species)으로 거듭나는 경험이었다고 합니다.
“창업 초기의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아직 시중에 없고, 많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뭔가를 만들면 고객은 저절로 생기지 않을까?’ 팔아본 적 없는 사람다운, 안이하기 짝이 없는 접근이었죠. 투자사에게 정말 많이 혼났어요. ‘사업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그런 식으로는 절대 소비자의 지갑을 열 수 없다’고요.
저는 ‘돈을 내고 싶다’야말로 ‘진심으로 좋다’는 표현 같아요. 길 가는 사람 잡고 물어봐요. 어떤 물건을 보여줘요. 처음엔 ‘아, 하나 있으면 편하게 쓸 것 같아요’ 하다가도 ‘이거 얼마인데 사실래요?’라면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면서 가요. ‘좋다’는 말은 쉽게 하죠. ‘사겠다’는 말은 쉽게 안 해요. 그러니 ‘팔아볼 고민’을 한 사람과 안 해본 사람은 완전히 다른 종인 거죠.”
팔아볼 고민에 온몸을 던졌던 지은씨의 지난 3년의 밀도는 체감상 10년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중 생존에 필요한 최소 수면을 제외하고 거의 18~20시간을 모두 일에 쏟아부었으니까요.
아침엔 집히는 대로 옷을 입고 출근해, 밤엔 기절해 쓰러지듯 잠드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언젠가 선배 창업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스타트업 대표의 삶이란 열 명분의 삶을 동시에 사는 것과 다름없다.’
솟아날 구멍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방이 가로막혀 있을 땐, ‘이런 미로보단 황금 감옥이 나았겠다’는 후회까지 했습니다.
“진짜 어려운 문제는 제대로 씨름을 벌여야만 풀린다는 걸 알게 된 거 같아요. 그 씨름판에 많이 나가본 사람만이 싸우는 방법을 찾는 데에도 능숙해지는 거죠.
채용 면접을 보다 보면 그런 분들을 만나요. 분명 학벌도 스펙도 다 너무 좋은데, 남이 써준 책을 줄줄 읽듯이 말하는 분들. 논리적으로는 무결하고 다 맞는 얘기거든요. 근데 자기가 경험한 게 아니에요. (씨름을) 책으로 배운 거죠.
저 역시 이제야 이 판에 나와서 맨머리를 깨고 있는 건데, 정말 힘들거든요. 근데 그만큼 정말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면 힘든 만큼 재밌으니까.”
2020년 출발해 올해로 만 세 살이 된 코딧의 고객사는 1,000여 곳. 그중에서는 포춘 500대 기업 중 10곳이 있으며, ‘당근’, ‘직방’, ‘강남언니’와 같은 국내 유니콘 스타트업도 적지 않습니다.
지난해 50억 원을 투자받고 현재 미국과 일본으로도 진출할 준비를 하고 있죠. 약 23년 치의 국회 의안 정보를 포함해 1억 건의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 방대한 데이터를 번역하고 추출하는 원천 기술로 8개의 특허를 취득했습니다.
지은씨는 스타트업의 대표이기만 한 게 아니라 평생 좇았던 공공의 일에도 기여하는 중입니다. 기획재정부의 중장기전략위원회의와 디지털플랫폼정부 위원회의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어요.
만약 그가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행정고시의 길을 선택했더라면, OECD 테뉴어라는 커리어의 고점을 스스로 꺾지 않았더라면, 없었을 오늘이지요.
Chapter5.상상을 한다 ‘내가 내가 아니었더라면’여자이기 때문에
#S6 “쟤는 뭔데 저기 서 있어?”
어디를 둘러봐도 ‘백인 남자’ 천지인 세계에서 일을 시작했다. 어딜 가든 비서나 인턴으로 오해받았다. 라운드 테이블의 중앙에 앉거나, 발표석 위에 오르면 모두가 물음표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다. ‘쟤는 뭔데 저기 서 있어?” 아시아인, 그것도 젊은 여자. 식당의 테이블 하나조차 당연하게 주어지는 건 없었다.
백인 남자였다면, 아니 적어도 남자였다면 치르지 않아도 되었을 대가들을 매일매일 치러냈다. 마땅히 자리에 있어도 되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내기 위해서. 이유 없이 모욕을 당할 때마다 머릿속에선 전쟁이 벌어졌다.
내가 아시아인이라 당한 일일까? 아님 내가 여자라서 당한 일일까?
OECD를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지은씨는 해방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내가 태어난 곳, 자신과 다르지 않게 생긴 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면 일상의 투쟁이 사라질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현실은 달랐죠.
인종의 장벽이 사라진 대신, 다른 장벽이 두 배, 세 배로 강력해졌으니까요.
“한밤중에 종종 전화를 받아요. 다짜고짜 큰소리를 쳐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오거나, 사소한 트집을 잡아 사과를 강요하는 내용이에요.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다시는 이쪽 바닥에 발 못 붙이게 해줄까?’라면서 협박하는 경우도 적지 않고요.
그 기세에 못 이겨 잘못한 게 없는데도 사과를 하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만약 내가, 내가 아니었으면. 내가 젊은 여성 CEO가 아니었으면. 그들과 비슷한 50대 중년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면. 내가 이토록 무례한 일을 당했을까? 이런 생각을 OECD 다닐 때보다 훨씬 많이 해요.”
일터에서 만나는 어떤 남자들은 너무 쉽게 사과를 요구합니다. ‘내 기분이 상했으니 너는 나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고 주장하죠.
착한 소녀, 무해한 여자가 되기를 요구받으며 자라 온 여자들은 대개 그런 상황에서 너무 쉽게 사과를 합니다. 이건 일종의 자동 반사입니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가 말했듯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죠.
‘나서지 말라, 거스르지 말라’는 메시지는 여자 아이가 사회화되는 과정 속에서 교리처럼 요구됩니다.
자동 반사적 반응엔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 행동을 곱씹다 보면 이내 모멸감이 밀려옵니다. 내 의지와는 다른 행동이었으니까.
부당한 상황 앞에 너무 쉽게 웃어버리고, 근거 없이 사과를 요구하는 이에게 머리를 숙이고 나면 스스로를 충분히 지키지 못했다는 후회와 짜증이 치밀기 시작합니다.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지?”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자기혐오와 자기의심 (self-doubting)의 하강 나선에 갇히게 되죠.
“최근에서야 그런 생각을 했어요. 잘못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 절대 사과하지 않겠다, 자기의심의 골짜기에 빠져서 주눅 들지 않아야겠다고요.
그리고 이유 없이 나를 끌어내리려 하는 사람 하고는 확실하게 맞붙어 싸워야겠다. 틀린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가서 고치면 돼요. 이런 마음을 먹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죠.”
‘3명의 힘(The power of three)’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10명의 사람 중 여성이 한 명이면 ‘토큰(구색 갖추기)’이 되고, 2명이면 존재감이 생기고, 3명이면 목소리가 된다는 뜻이죠.
살아오는 내내 어디를 가든 유일한 토큰(token)이었던 지은씨가 만든 회사엔 그를 따른 여성 후배들이 ‘3명의 힘’을 만들고 있습니다.
“제가 여성이기 때문에 대표로서 여성 직원들이 겪는 고뇌가 더 민감하게 보이는 것 같아요. 여자들은 그렇거든요. 자기가 나서서 요구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해요. 기회도, 월급도, 성과도 빼앗기죠.
그래서 저는 좀처럼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여성 직원들에게 하나라도 더 물어봐요. 당신이 여기에 얼마나 기여했느냐고, 이런 기회를 원하지 않느냐고.
공적인 말하기가 필요한 자리가 있을 때마다, 여성 직원들을 내보내요. 자신 없어 하더라도 일단 찬스를 주는 이유는요, 지금까지 안 해봤기 때문에 본인이 못한다고 생각했을 확률이 높아서예요.”
‘정당한 몫을 요구하는 것도, 자신을 드러내어 마땅히 인정받는 것도 많이 해봐야 익숙해지는 일이다.’
이 말은 여성 직원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여성 대표인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너무 쉽게 스스로를 검열하고 힐난했던 지난날의 자신과 화해하기 위해, 또 뒤따라오는 여자들이 걸어갈 길은 다르길 바라는 마음으로.
Epilogue.내 커리어는 ‘박살’의 연속, 그 충격으로 맨땅을 깼다
‘OECD라는 직장이 그렇게 아깝게 보이나?’
요즘 지은씨가 자주 하는 생각입니다. 지은씨를 처음 만나는 사람마다 도대체 왜 그만뒀냐는 질문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말미에 이르러, 역시나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 좋은 직장을 왜 그만뒀어요?” 지은씨는 지금의 자신에겐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했습니다.
한번 새로운 세상을 보고 난 다음에는 절대로 그 전의 내가 있었던 곳으로 못 돌아가요. 내가 배울 수 있는 것,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많아지는 큰 세상을 이미 보고 왔는데, 원래 있던 곳에 안주할 수는 없어요. 아예 안 봤으면 모를까.”
일의 좋고 나쁨을 따지는 보편적 기준은 육각형 그래프에 점수를 매기는 방식과 닮아있습니다.
연봉은 얼마인가, 회사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직업의 안정성을 보장하는가, 정시 퇴근할 권리와 넉넉한 휴가가 주어지는가. 남들 보기에 좋은 직장, 남들이 우러러볼 만한 좋은 직업이라는 건 대개 이 테두리 안에서 결정됩니다. 육각형 그래프에서 얼마나 더 넓은 면적을 차지하느냐의 문제죠.
지은씨는 이 육각형의 세계관을 찢고 나온 돌연변이입니다. 보기 드물게 꽉 찬 육각형의 직장 OECD를 버리고 나왔으니, ‘왜 그랬어?’라는 질문이 쏟아질 수밖에 없겠죠.
그 역시도 자신이 돌연변이라는 사실을 알기까지 15년이 걸렸습니다. 낯선 환경에 자신을 가져다 놓지 않았더라면, 아마 평생 몰랐겠지요. 자신에겐 보장된 미래보다 현재의 몰입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가 말한 ‘몰입’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반쪽짜리 글도, 10분짜리 동영상도 소화하기 힘들어진 ‘집중력 바닥’의 시대, 이력서를 받아보면 3~6개월 단위의 이직이 흔하디흔해진 시대. ‘깊이 파고 드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 지은씨가 인터뷰 내내 여러 번 반복했던 말이 떠오르더군요.
“되돌아가는 길은 없어요. 한번 건너온 길은 불태워 버려야 해요. 그래야 집중할 수 있어요. 내 앞에 펼쳐진 것들에.”
읽기에
집중할래요
목차
- Chapter1. 궁극의 ‘독기캐’, 남들에겐 당연한 게 하나도 당연하지 않았다
- Chapter2. 경쟁률 400:1의 OECD 공채, '영점 조절'의 힘으로 뚫다
- Chapter3. 그가 자기 손으로 만든 황금 궁전을, 자기 손으로 깨부수고 나온 이유
- Chapter4. CEO라는 새로운 인종으로 자신을 개조하다
- Chapter5. 상상을 한다 ‘내가 내가 아니었더라면’ 여자이기 때문에
- Epilogue. 내 커리어는 ‘박살’의 연속, 그 충격으로 맨땅을 깼다
ASK YOURSELF
당신에게 던지는 질문
툴키트 질문에 당신의 답을 적은 뒤 제출하기 버튼을 눌러보세요. 커리업지기가 직접 읽어보고 이메일로 답장을 보내드립니다.
Q. 1
당신의 재능, 강점, 역량을 통해 ‘기여’(寄與 : 도움이 되도록 이바지함)하고 싶은 분야가 있나요? 왜 그 분야에 기여하고 싶나요?Q. 2
당신의 커리어에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도록 불태워 버린 다리’는 무엇인가요? 그 다리를 건너기 전과 후, 당신의 업(業)생은 어떻게 바뀌었나요?Q. 3
어디선가 '토큰(구색 갖추기용 소수자)'이 되어 본 적 있나요? 당신이 겪었던 '토큰'으로서의 경험을 공유해주세요. 다수에 속하는 쪽이었다면, 당신 곁의 토큰은 어떤 모습이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