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케는 돌무더기에서 싹을 틔웠다" 씨앗부터 키우는 정원사 - 김봉찬 베테랑
베테랑의 한끗 vol.5
“베케는 돌무더기에서 싹을 틔웠다”
씨앗부터 키우는 정원사
2024년 6월 21일
잠깐! 이 페이지는 한국일보 커리업 연재물 ‘베테랑의 한 끗’ 전용 화면입니다. 오디오와 고화질 사진이 어우러져 제공되는 특별한 기사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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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박, 자박, 자박
사각, 사각”
이 정원엔 없는 게 많다.
웅장한 수형을 자랑하는 잘생긴 소나무도, 호화로운 색을 뽐내는 팬지도. 이것들의 공통점은 어디에서든 ‘혼자만’ 빛난다는 것.
홀로 화려한 주인공이 물러난 자리를 채운 건 하찮은 풀들이다. 비가 오면 ‘떡진 머리’처럼 엉겨 붙는 줄사초, 제주의 깊은 숲에서 자생하는 고사리, 길고 흰 수염을 닮은 가는잎나래새, 이슬을 머금고 자라난 깃털이끼까지.
하나씩 뜯어보면 미미한 것들인데, 이 정원에선 싱그러운 빛을 내뿜는다. 왜일까. 약을 치지 않아 건강해진 땅 위에 자라서다. 지렁이·곤충·새·나비들과 함께여서다.
야생의 들판을 툭 퍼다 옮겨 놓은 듯한 이곳, 제주 서귀포시 신효동의 ‘베케’다. 베케는 한국에서 보기 드문 ‘자연주의 생태정원’이다. 이곳을 만든 사람은 34년 차 제주토박이 정원사.
그는 스스로를 “베테랑이고 뭐고 모르겠고, 난 그냥 촌사람”이라며 낮추지만, 알고 보면 그는 정원계의 대가다.
경기 포천시의 평강식물원, 경북 봉화군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의 암석원, 경기 광주시 화담숲에 있는 암석원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국내 최초로 암석원, 습지원, 고층습지를 조성했다.
암석원은 산지의 경사면을 모방해 고산식물을 키워내는 정원을 말한다. 습지원은 다양한 수생식물을 식재해 여러 동식물의 서식지가 되도록 만든 정원이다. 고층습원은 동식물의 사체가 퇴적된 이탄습지를 정원으로 재현한 곳이다. 정원을 좀 아는 이들 사이에선 ‘철인 3종’이라 불릴 정도로 만들기 까다로운 정원들이다.
그는 내로라하는 조경 디자인 장인이기도 하다. 제주 서귀포시 비오토피아의 생태정원, 서울 성수동 아모레 성수가든, 서울 한남동 모노하의 조경이 그의 손을 거쳤다. 세계적인 건축가 페터 춤토어, 고(故) 이타미 준과도 호흡을 맞췄다.
그럼에도 손사래를 치며 ‘촌사람’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이유는 뭘까.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내가 잘나서 안 게 아니라 그냥, 자연이 알려준 거예요.” 그를 베테랑으로 만든 모든 바탕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촌, 그러니까 제주의 자연에서 왔기 때문이다.
베테랑 가드너, 베케 정원과 조경 회사 ‘더가든’의 대표인 김봉찬(59)씨를 지난달 27, 28일에 걸쳐 베케에서 만났다.
베테랑의 시간 :
통제해선 안 되는 자연의 순리
베케는 김 대표의 철학이 집약된 정원이다. 2018년 만들었다. 베케가 들어선 땅은 98세인 그의 노모가 젊어서부터 일구던 고향 밭이었다. 한라산 남쪽 자락에 안긴 서귀포시 효돈은 400여 년 전부터 예로부터 감져와 지슬(각각 고구마·감자를 이르는 제주 말)을 키우던 지역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밭에 감귤 나무를 심기 시작했던 것은 약 40년 전. 이 일대가 전부 과수원으로 바뀌며, 제초제와 살충제가 뿌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9년 전 어느 날, 어머니의 과수원 땅 근처에서 이끼로 가득한 돌무더기를 발견했어요. 제주 사람들은 밭을 쟁기로 일굴 때 나오는 큰 돌을 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거든요.”
‘베케’의 시작점이 된 과수원의 돌 무더기
제주에선 돌들이 언덕처럼 쌓인 무더기를 ‘베케’라고 부른다. 여기서 따와, 그는 이 생태정원을 베케라고 이름 붙였다.
“오랫동안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던 돌무더기였어요. 제주에 널리고 널린 게 돌이니까. 그런데 우연히 귤나무 그늘에 가려져 있던 다른 쪽 면을 보게 된 거예요.
귤나무는 상록수라 사시사철 빽빽한 그늘을 드리워 주거든요. 돌무더기의 북쪽 면을 무성하게 뒤덮은 깃털이끼를 보는 순간, 여기다 싶었죠. 여기에 내 정원을 만들어야겠다고 그때 생각했어요.”
다짐은 오래된 슬픔에서 비롯됐다.
정원을 하나씩 만들 때마다 인생의 한 시절을 바쳤지만, 돌아설 때마다 불안했다. 공들여 빚어 놓은 경관은 주인이 바뀌면 얼마 가지 않아 망가졌다.
자신이 심은 식물들이 툭툭 잘려 나간 것을 봤을 땐, 한동안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애지중지 키운 자식과 생이별한 듯한 애통함” 때문이었다. 눈이 빠져라 고민했던 시간이 절로 덧없어졌다.
조용히 품은 꿈이 있었다. 언젠가 내 정원을 만들게 된다면, 자연의 시간을 통제하지 않는 ‘자연주의 생태정원’을 만들겠다는 소망.
“가드닝은 ‘자연의 시간을 다스리는 기술’이에요. 야생에서라면 수백 년이 쌓여야 볼 수 있는 광경을, 정원 안에선 몇 년 안에 볼 수 있도록 인간의 손이 개입하는 거죠. 여기서 명심해야 할 사실이 있어요. 시간을 다스릴 순 있어도 통제하려 들어선 안 된다는 거예요.”
그가 정원을 만들 때 농약을 쓰지 않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농약을 쓴다는 건, 자연의 시간을 ‘0’으로 만드는 행위죠. 당장은 해충이라 불리는 곤충들이 죽고, 잡초가 사라질 거예요.
그와 동시에 땅의 시간은 초기화돼요. 오랜 시간 땅에 쌓였던 유기물이 파괴되고, 그 안에 살고 있던 다양한 미생물은 죽어버리죠. 토양에 쌓인 몇백 년의 역사가 사라지는 거예요.”
베케의 터전엔 처음부터 농약을 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벌레들의 파라다이스’가 됐다. 수시로 약을 뿌리는 과수원에서 도망친 벌레들이 몰려든 거다.
벌과 나비들은 이끼에 맺힌 물을 마시려고 날아들었고, 땅엔 사라졌던 미생물과 지렁이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맨발로 들판을 누비며 본 곤충들을 다시 만났다.
“어머니가 일군 밭을 생각했어요. 작은 배추들이 띄엄띄엄 심어져 있죠. 붙여 심으면 땅의 영양분을 넉넉하게 나눠 먹지 못하거든요. 그런 밭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드세요? ‘아, 배추가 탐스럽게 크면 좋겠다’는 기대감이 들죠.
어린 수목을 띄엄띄엄 심은 정원을 보면 어떨까요. 반대로 생각할 거예요. ‘애걔, 왜 이렇게 비었어. 없어 보이네?’ 정원은 처음부터 꽉 차 있어야 한다고 여기니까 그런 거예요. 은연중에 처음부터 완성된 모습으로 상정하는 거죠. 그러니 처음부터 큰 나무를 사다가 심고, 알록달록한 꽃들로 빽빽하게 채우는 겁니다. 인간의 욕망이 지배하는 정원이죠.”
그래서 그의 정원은 시작부터가 다르다.
“정원을 만드는 마음은요, 밭을 만드는 마음과 같아요. 땅을 귀하게 여길 줄 안다면 다 채워선 안 돼요.”
정원에도 ‘자연의 시간이 깃들 여지’가 필요하단 얘기다. 듬성듬성 비어있는 여백을 보며, 어린 수목의 성장을 두근두근 기다릴 수 있도록.
베테랑의 루틴 :
씨앗부터 키운다
자연의 시간을 인간의 잣대로 통제하지 않겠다는 겸허한 태도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씨앗부터 키워본 경험에서 왔다. 50년 전인 소년 시절부터 시작된 루틴이다.
“어머니는 뜰에 온갖 꽃을 심었어요. 백합, 진달래, 국화, 달리아, 과꽃, 원추리꽃… 70년대 가난했던 제주엔 먹을 건 풍족하지 않아도, 마당의 정원만큼은 풍성했어요. 나도 지천을 뛰어다니면서 꽃 뿌리를 캐어 왔죠.
하루는 야생 백합인 참나리를 뿌리째 뽑아 들고 갔어요. 그런데 며칠도 못 가 픽 죽고 마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가짜 뿌리였어요. 뿌리라고 여겼던 땅속보다 더 밑을 더 파보니까 진짜 뿌리인 ‘알뿌리’가 숨어 있더라고요.”
식물에 미친 사람에게 한반도 식생의 절반이 자라는 제주는 천국이었다. 생물학도였던 대학생 시절엔 텐트 하나 둘러멘 채 한라산을 보름씩 파고들었다.
첫 직장인 여미지식물원에 입사한 이유도 식물 탐구를 계속하고 싶어서였다. 당시 여미지는 한 해에만 10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다녀가는 제주 최대 규모의 식물원이었다.
“웬걸, 들어가 보니 생각했던 거랑은 달라. 허구한 날 팬지만 심는 거예요. 게다가 나는 조경학도, 원예학도 아닌 생물학 전공자잖아요? 그러니 처음엔 리어카만 줄창 끌고 다녔죠. 대학에선 '어떻게 제주에서 나는 식물을 다 꿰고 있냐'며 6년 동안 천재 소리를 들었는데.”
4년을 꾸역꾸역 버티다 어느 날 원장을 찾아가서 말했다.
“여긴 발전 가능성이 없는 식물원입니다.”
뜬금없는 그의 말에 원장은 이유를 물었다. 그는 일주일간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걸 유심히 읽어본 원장이 제안했다. 여기에 쓰인 걸 직접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보고서에다 ‘인덱스 세미넘(Index Seminum)’이 필요하다고 썼어요. ‘종자 목록’이라는 뜻인데, 전 세계의 수목원, 식물원들과 종자를 교환하는 전통이죠. 사고파는 게 아니라, 물물교환이에요. 우리 것을 주고 그들의 것을 받아오는 거죠.”
‘인덱스 세미넘’은 ‘생물다양성협약(CBD)’에 근거한 세계적 비상업적 종자교환 프로그램이다. 1995년 당시 사립 수목원 중엔 전국을 통틀어 오직 천리포수목원만이 하고 있었다. 해외 유명 식물원에선 정원사들의 ‘제1 업무’지만, 국내에선 아직도 생소한 개념이다. 한국의 식물원은 으레 연구 기관이 아닌 관광 명소로 여겨지니까.
전 세계 160개국 식물원 앞으로 종자 교환을 제안하는 편지를 썼다. 당시만 해도 줄 것보다 받을 게 많았으니 그야말로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거래였다.
종자와 함께 동봉된 식물원의 책자, 리플릿은 차근차근 번역해 여미지식물원만의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었다. 미국의 브루클린식물원, 독일의 다렘식물원, 영국의 큐식물원 등 전 세계에서 날아온 수만 개의 씨앗이 그의 재배 온실에 모였다.
“나 혼자서 1년에 700종을 키웠죠. 생태학을 배웠으니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게 그리 어렵진 않았어요. 키우다가 문제가 생기면 씨를 준 사람에게 팩스로 해결 방법을 물어봤죠. 그게 다 배움의 과정이었어요. 나중엔 잎사귀의 모양만 보아도, 씨앗의 모양만 보아도 키우는 방법이 절로 그려졌죠.”
1년에 700종씩 6년을 쉬지 않고 무려 4,200종을 키웠다.
한라산부터 백두산까지 한반도에 자생하는 식물 수가 5,500여 종이다. 그의 손에서 한반도 식물의 80%에 달하는 생물이 싹을 틔웠단 얘기다.
그뿐이 아니다. 제주 고산지대에서 자생하는 식물인 암대극, 한라산 백당나무, 줄사초의 씨앗을 채집해 온실에서 직접 육종하기도 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어요. 오랫동안 목 빼고 기다렸던 씨앗이 있었거든요. ‘빅토리아수련’이라고 잎의 지름이 2m 남짓인 연꽃이에요. 외국에서 온 소포를 열어보니, 얕은 물에 담긴 작은 씨앗에서 벌써 발화할 기미가 보이는 거예요. 두 손으로 소중하게 받쳐 들고 비닐하우스까지 냅다 달려간 기억이 나요. 너무 신이 났죠.”
그러면서 알게 됐다. 씨앗부터 내 손으로 키워낸 것들엔 더 짙은 애정이 깃든다는 사실을.
“강아지 입양할 때를 생각해 보세요. ‘어린 새끼는 손 많이 간다’는 이유로 처음부터 성견을 데려오지 않잖아요? 식물이라고 왜 달라요.”
포천 관음산 자락에 평강식물원을 만들 때 씨앗부터 심은 이유다.
“식물원 조성을 의뢰한 원장한테 처음부터 신신당부했죠. 오픈까지 최소 7년은 기다려 달라고.”
물론 쉽지 않았다.
“포천의 산속은 겨울엔 영하 35도까지 떨어져요. 뭘 심어도 겨울에 다 죽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 혹독한 겨울 기후를 견딜 수 있는 야생목, 야생화를 심어야겠다 싶었죠.
가까운 명지산부터 시작해 백두산, 설악산, 지리산을 다니면서 씨앗을 직접 수집했어요. 고지대에서만 자라는 털진달래, 시로미 같은 고산 식물 종자를 가져왔죠.”
이번엔 무더운 여름이 문제였다. 고민 끝에 찾은 방법은 돌이었다. 땅을 파내고 암석을 수천 톤가량 깔았다. 돌이 만들어 내는 시원한 지열로 고산 식물이 여름을 견딜 수 있게 만든 거다.
영국 최고의 식물원인 위슬리가든도 100년이 넘는 시행착오 끝에 터득한 고난도 기술이다. 그 기술을 국내 최초로 그가 구현했다. 평강식물원이 국내 최초의 암석원으로 자리매김한 배경이다. 현재까지도 국내에서 암석원을 제대로 만들 수 있는 인물은 그뿐이다. ‘씨앗을 틔워내겠다’는 집념이 만든 결과다.
“평강식물원을 처음 열었을 땐, 큰 나무 없이 풀들만 잔잔하게 있어 마치 들판 같았어요. 시간이 지나며 경관이 바뀌었죠. 어린나무들이 자라며 새로운 풍경을 만든 거예요.”
의도했던 바였다. ‘성장의 과정’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베테랑의 도구 :
집요하게 분석하는 눈
지금이야 조경계의 금손으로 손꼽히지만, 그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한때 소문난 ‘똥손’이었다.
“30년 전, 여미지식물원에 다닐 적엔 내가 뭐만 하려고 하면 주위에서 절대 못 하게 했어요. 식물은 잘 키우는데, 정원을 예쁘게 꾸미는 건 못했으니까. 오죽하면 내 손발을 묶어 놓으려고 출동하는 '전담 요원'이 있을 정도였죠.”
타고나길 감각이 좋은 이들을 보니, 곁눈질로 대충 보고도 쉽게 아름다움을 모방했다. 궁금했다.
‘나도 저게 예쁘다는 걸 아는데, 왜 따라 할 수는 없는 걸까?’
“세상에 ‘똥손’은 있어도 ‘똥눈’은 없어요. 아름다움을 인지하는 눈은 모두가 가지고 있죠. 똥손들은 단지 아름다움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모를 뿐이에요.
이걸 알아내기 위해 택한 방법이 하염없이 보는 거였어요. 질릴 때까지 바라보면서 분석하고 해체했죠. 멀쩡한 라디오를 뜯어서 부품 단위로 늘어놓듯이. 다 뜯고 나면 반대로 조립해요. 그러면서 아름답게 만드는 법을 깨우치는 거죠.
예를 들어 볼게요. 큰 갈빗집에 흔히 인공폭포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걸 보면서 좋다는 생각은 잘 안 들죠. ‘왜 별로일까?’ 자연의 폭포를 하루 종일 보면서 비교했죠. 분명한 차이가 있더라고요. 인공폭포는 대개 돌들을 안정적으로 차곡차곡 쌓아 만들어요. 자연의 폭포는 그렇지 않죠. 떨어질 듯 말듯 돌들이 아슬아슬하게 맞물려 물의 저항을 견뎌내요. 그것이 아름다움의 비결이더라고요.
보고 또 보며 수백 번 분석해 보니 나 같은 똥손도 차츰 아름다움의 원리를 이해하게 됐죠.”
그의 첫 번째 조경 프로젝트였던 제주 핀크스 비오토피아 내의 생태공원이 그렇게 탄생했다. 뒤로는 한라산과 오름이 보이고, 앞으로는 산방산과 제주의 남쪽 바다가 보이는 곳이었다. 핀크스 비오토피아 내의 수(水)·풍(風)·석(石) 뮤지엄과 방주교회, 타운하우스 등의 부지 내 건축물은 ‘빛의 건축가’라 불리는 세계적인 거장 이타미 준이 맡았다.
땅 위에 아무것도 없던 시절부터 건축물이 완성될 때까지 4년, 그는 매일 부지의 주변 환경을 보고 또 봤다. 하루 24시간 해의 변화, 사계절의 변화무쌍한 자연을 눈에 담았다. 동터 오는 새벽녘, 태양이 작열하는 한낮, 땅거미가 지는 해 질 녘의 풍경부터 거센 비가 내리는 날, 엷은 안개가 낀 날, 짙은 구름이 깔린 날, 티 없이 해가 화창한 날의 풍경을 관찰했다.
그제야 어떻게 조경해야 할지 떠올랐다.
“정원을 만들기 가장 어려운 곳이 어디냐면, 금강산 앞이에요. 자연의 절경보다 아름다운 정원은 없으니까.
핀크스 비오토피아의 부지도 조건이 비슷해요. 멀리 보이는 산방산이 정말 멋졌죠. 그 옆의 바다는 웅장했고요. 그런 자연 풍광이 주인공인 곳이에요. 조경이 시끄럽게 나대서는 안 됐죠. 그렇다고 너무 힘을 빼서 허술해 보여서도 안 되고요.
그래서 조경의 키워드를 ‘겸손하되 세련되게’로 잡았어요.”
‘우렁차지 않고 겸손한’ 식물들을 골랐다. 꽃이 화려하게 피지 않는 작은 왜성종 나무를 많이 썼다. 대지 위에 거대한 원형 띠처럼 올라온 물 미술관 옆엔 벼과 식물인 억새를 심었다. 커다란 선을 자잘하고 여리여리한 선으로 이으려는 의도였다.
그는 후배들에게 ‘조경을 하려면, 현장에 100번은 가 봐야 한다’고 말한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서도 변하기에 한 번만 봐선 파악하기 어렵다. 아침 풍경만 보고 서쪽에 나무를 심었는데,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를 막아버린다면 ‘망한 조경’이 될 테니까.
“아모레 성수가든의 표정은 ‘촉촉하게, 아름답게’였어요. 서울은 안 그래도 건조한 도시인데 성수는 공장지대라 더 삭막하거든요.
여기에 아주 촉촉한 정원을 만들어야겠다 싶었죠. 그 의외성에서 매력이 얼마나 극대화가 되겠어요. 바닥을 1.5m까지 파내고 배수가 좋은 토양을 채웠어요. 거기에 작은 계곡을 만들었죠.”
그에게 눈은 ‘경관의 표정을 파악하는 레이더’다. 아름다움의 원리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온 세월이 벌써 34년째. 쉬지 않고 갈고닦은 덕에 눈은 한층 밝아졌고, 그만큼 고집도 세졌다. ‘맞다’고 생각한 건 절대 굽히지 않는다.
“어디서 보고 외운 지식이 아니라, 경험으로 쌓은 내 지식. 난 그걸 믿거든요. 그게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탄탄한 거니까.”
베테랑의 한 끗 :
식물의 삶을 이해하는 시선
당신을 베테랑으로 만든 ‘한 끗’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자연을 보는 눈, 식물의 삶을 이해하는 시선이에요.”
그런 시선은 타고난 건가요.
“그럴 리가요.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두 개의 시간이 자연을 보는 눈을 만들었죠.”
그가 말하는 ‘두 개의 시간’ 중 첫째는 열일곱 살 때다. 마음 잡고 공부를 해보겠다며 암자에 들어갔다. 한라산 남쪽 자락 깊숙한 곳에 숨은 곳이었다. 수도조차 들어오지 않아서 동굴에 맺힌 물을 받아 먹었다. TV도, 친구도 없었다. 책을 파러 들어가선 종일 들판을 떠돌았다.
“꽃과 풀을 보는 게 정말 행복하더라고요. 나중엔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꽃과 풀들을 따다 신문지에 끼우고 벽돌로 눌러 표본을 만들었죠. 암자에서 나올 때 세어 보니 100개가 훌쩍 넘었어요. 그때 알았죠. ‘난 평생 식물을 해야 하는 사람이구나’.”
다른 하나는 평강식물원을 만든 서른다섯 살 때다. 일손을 거드는 직원들이 퇴근하고 나면 적막한 산 한가운데 혼자였다. 17년 전 암자에서 살던 때가 떠올랐다.
“주위의 자연을 들여다보고 또 봤어요. 식물의 입장에서도 보고, 곤충의 입장에서도 보고, 땅의 입장에서도 봤죠. 불순물들을 없앤 내 일의 ‘결정체’를 그때 깨달았어요.”
그 ‘결정체’란 무엇인가요.
“자연 안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아주 작다는 것. 그 후로 사사로운 욕망 같은 건 버리게 됐죠. 욕심을 잘못 부렸다간, 자연의 균형을 깨거나 땅의 시간을 역행시킬 수 있으니까.
평생 이 일을 하다 죽는 날이면, 지구를 향해 한마디 남기고 싶어요. ‘잘 머물다 갑니다. 참 잘 보고 가요.' 식물의 성장을 지켜보는 게 내 인생 최고의 행복이었구나, 고마워하면서.”
광막한 자연의 힘 앞에서, 스스로를 비울 줄 아는 깨끗이 겸허한 태도. 이것이야말로 베테랑 김봉찬의 숨겨진 한 끗이 아닐까.
베케는 그가 깨달은 ‘결정체’와 닮아있다. 돌무더기의 이끼 면을 바라볼 수 있게 배치한 뮤지엄 건물은 ‘성큰(sunken)’ 구조로 지었다. 땅을 파내어 만든, 주변보다 낮은 지형의 공간이다. 이끼 정원을 담은 커다란 창 앞에 서면 땅 표면의 선이 인간의 눈높이에 온다. 서 있어도 엎드린 꼴이 되는 셈이다. 자연을 섬기듯, 우러러보는 구조다.
Editor's Note
베테랑 정원사 김봉찬의 인터뷰, 재밌게 읽으셨나요?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많아요. 그와 녹음기 바깥에서 나눈 대화를 6월 27일 자 커리업 뉴스레터에서 독점으로 공개합니다. 비하인드 에피소드를 놓치지 않으려면? 아래 버튼을 눌러 지금 바로, 레터를 구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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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Chapter1. 베테랑의 시간 : 통제해선 안 되는 자연의 순리
- Chapter2. 베테랑의 루틴 : 씨앗부터 키운다
- Chapter3. 베테랑의 도구 : 집요하게 분석하는 눈
- Chapter4. 베테랑의 한 끗 : 식물의 삶을 이해하는 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