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동안 번역한 문장만 5만 쪽...
책상 위의 수도승 - 김명남 베테랑
베테랑의 한끗 vol.6
18년 동안 번역한 문장만 5만 쪽...
책상 위의 수도승
2024년 7월 12일
잠깐! 이 페이지는 한국일보 커리업 연재물 ‘베테랑의 한 끗’ 전용 화면입니다. 오디오와 고화질 사진이 어우러져 제공되는 특별한 기사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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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해파리, 영생해파리? 아아 불사해파리...
(타닥, 타닥 자판기 치는 소리)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안방의 침대에서 일어나 옆방의 책상으로 출근한다.
마감이 임박했다고 며칠 밤을 뜬눈으로 꼬박 새우는 법은 없다. 매일매일 9시간, 많게는 12시간씩 책상 앞을 지키며 일한다. 그 항상성의 원천은 한 줄짜리 자기 규율이다.
‘40분 일하면 20분은 쉰다. 그걸 매시간 반복한다.’
‘애걔’ 싶을 정도로 간단하다고? 이 원칙을 비범하게 만드는 건 원칙 자체가 아닌 ‘실행 이력’에 있다. 베테랑 과학책 번역가 김명남(49)씨는 이 원칙을 18년 동안 지켰다. 태풍에도 제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동상처럼, 여행 한번 길게 떠나는 법 없이.
‘대단할 게 뭐 있어?’라는 생각이 든다면, 나흘만 따라해 보자. 휴대폰도 메신저도 메일함도 보지 않고 40분을 몰입할 수 있는가. 40분마다 엉덩이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가. 20분만 쉬고 다시 칼같이 책상 앞에 앉을 수 있는가. 그런 사이클을 파괴하지 않고 8회 연속 반복할 수 있는가. 몸으로 알게 된다. 짐작한 것의 100배쯤은 어렵다는 것을. 대개는 집중력도 지구력도 따라주지 않는다.
베테랑의 노하우라는 게 늘 그렇다. 보기엔 쉬워도 행할 땐 딴판인 법.
간단한 원칙을 20년 쌓아 올린 결과는 어땠을까.
거창할 것 없는 이 단순한 작업법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120권의 책이 옮겨졌다. 첫 10년 동안 1년에 9권씩, 그 이후로는 1년에 5권 안팎으로 꾸준히. 5만 쪽에 달하는 문장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연결했다.
베스트셀러를 넘어 스테디셀러가 된 ‘지상 최대의 쇼’(리처드 도킨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리베카 솔닛),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스티븐 핑커) 등이 그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그를 만나자마자 꾸준함의 비결부터 물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묻는다.
“대단할 게 뭐 있나요. 관성을 벗어날 줄 몰라 이렇게 살아온 것일 뿐인데.”
끈기라는 꾸밈없는 덕목이 곧 삶의 태도가 된 사람다운 반문이었다.
베테랑의 도구 :
덜어내기, 덜어내기, 또 덜어내기
20년 전 시작한 번역은 퇴근 후 저녁 시간을 쪼개 시작한 부업이었다.
때는 2004년, 인터넷선이 깔리지 않은 낡은 집에서, 베개보다 두꺼운 사전을 일일이 넘겨가며 가내 수공업 하듯 한 땀 한 땀 문장을 옮겼다. 그때 알았다. 이 일이야말로 그에겐 평생 특별한 모험이 되리라는 것을.
남들이 잘하는 걸 보면 머리가 펄펄 뜨거워질 정도로 질투가 나는 일, 그만큼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고 나만의 방식으로 잘 해내고 싶은 일은 처음이었다. 과학고 → 카이스트 → 서울대 → 신문사 → 인터넷서점… 10년을 갈지 자로 종횡무진 헤매다 비로소 다다른 도착지였다.
운명의 상대를 한눈에 알아본 이유가 있다. 숱하게 겪어 온 착오의 순간들 덕분이다.
체육엔 영 소질이 없던 중학교 시절 ‘그 학교엔 체육 시간이 없다더라’는 엉뚱한 이유로 덥석 과학고에 지원했다. 동급생 대다수를 따라 카이스트에 입학하고 보니 모두들 꿈이 과학자가 되는 거였다, 자기만 빼고.
주위를 둘러보면 전부 한 길만 깊이 팔 줄 아는 ‘오타쿠’들인데, 혼자만 잡학다식에 열광했다. 전공인 화학 공부는 뒷전이었고, 교양으로 과학사를 가르친 강사만 따라다녔다. 첫째 착오였다.
졸업은 다가오는데 뾰족한 수 없이 세상에 나가려니 배짱이 부족했다. 어영부영 대학원에 들어갔다. 동기들을 보며 또 한 번 이질감을 느꼈다. ‘난 성실한 학생일 순 있지만, 결코 연구자가 될 순 없는 사람이구나.’ 혹시나 했지만 여전히 같은 결론, 둘째 착오였다.
아예 방향을 바꿔보기로 했다.
깊게 보단 ‘넓게’ 파는 버릇을 살려 기자가 됐다. 그곳은 거칠고 빠른 세상, 외향인들의 세상, 게다가 그 시절엔 남자들이 기본값인 세상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가 가진 기질과 반대였다. ‘여기서 이토록 조그맣고 느린 내가 대체 무얼 할 수 있을까’ 자괴감에 절로 뒷걸음질 쳐졌다. 셋째 착오였다.
착오가 반복되니 케케묵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난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거야?’
“사는 내내 책벌레였어요. 명절마다 온 가족이 집에 모이면 방구석에 틀어박혀 책의 세계로 도망쳤죠. 표지에 찍혀있던 번역가들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해요. 김석희, 이윤기, 안정효, 김화영… 뭣도 모르고 생각했죠. ‘평생 내가 좋아하는 책과 살려면, 이런 일을 해야 되겠구나.’”
그래서 이번엔 책을 업으로 삼아보기로 했다. 인터넷 서점에 취직해서 처음 했던 일은 신간을 읽고 맘에 드는 작품을 골라 소개글을 쓰는 거였다. 달콤했다. 세상에 이만큼이나 일 같지 않은 일이 또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연차가 쌓이고 ‘책을 많이 파는 것’이 임무가 되자 깨달았다. ‘난 책을 좋아하지만 파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은 아니구나.’ 넷째 착오였다.
“퇴사는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어요. 프리랜서로 시작한 번역일과 인터넷 서점일을 ‘투잡’으로 한 지 3년째가 되어가고 있을 때였죠. 진짜 잘하고 싶은 일만 남기고 싶었거든요.”
착오에 착오를 거듭하며, 불순물을 ‘덜어내듯’ 찾은 길이었다. 그게 자기 방식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후 전업 번역가로 산 18년은 ‘무엇을 더 해볼까’를 고민하기보단 ‘무엇을 덜 할까’에 집중해온 세월이었다. 덜어내기를 거듭하며, 삶은 급속도로 단순해져갔다.
이를테면 이랬다.
고단함을 달래기 위해 습관적으로 마시던 술부터 끊었다. 작업 컨디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둘째 치고, 술자리에 빼앗기는 시간이 아까웠다. 술자리에 나가지 않으니 덩달아 인간관계도 단출해졌다.
유일한 여가라곤 야구 경기를 시청하는 것이었는데, 한번 보기 시작하면 3,4시간이 훌쩍 사라진다는 걸 깨닫곤 미련 없이 접었다.
일상의 쾌락 중 지금껏 남긴 건 오직 음악을 듣는 것뿐. 일에서 받은 긴장을 이완하고, 혼자 사는 일상을 적막하지 않게 만들기 위한 수단이다. 식사 메뉴 역시 대체로 똑같다. 일주일에 한 번 일주일 치 식재료를 준비해 두고, 내리 같은 음식만 먹는다.
그의 삶을 구성하는 카테고리는 딱 세 가지다. 일과 독서, 운동과 산책, 그리고 최소한의 자기 돌봄. 이토록 삶의 모든 군더더기를 덜어낸 이유는 하나다.
“수도승 같은 삶이죠. 오래도록 이런 간결한 삶을 갈구해왔어요. 오직 번역에만 완벽하게 몰입할 수 있는 깨끗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게 저의 가장 큰 행복이거든요. 부양할 가족이 있다거나, 누군가를 돌봐야했다면 이런 삶을 살 수 없었을 거예요. 제겐 가족을 만들지 않은 것, 취미를 덜어낸 것이 포기라든가 희생이 아니었죠.”
오히려 그 반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전략이었다. ‘40분 일하고 20분을 쉰다’는 작업법 역시 번역을 더 오래, 더 잘하기 위한 장기 공략법이었다. 실패를 줄이기 위해 단순하게 만든 거다. 복잡할수록 실천과는 멀어지는 법이니.
변주 없이 매일 똑같은 하루, 넌더리가 난 적은 없었을까.
“지겹지 않았어요. 번역의 세계에서 끝없는 모험을 하고 있었으니까. 어린 시절의 나는 목소리도 작고, 걸음도 느리고, 늘 수줍은 아이였는데, 책을 통해서만큼은 늘 거리낌 없이 넓은 세상을 탐험할 수 있었거든요. 커서도 똑같았죠.
저자의 세계관, 가치관이 깊이 배어든 문장을 읽고 옮기는 것이 제겐 곧 삶을 배우는 시간이었던 거 같아요.
비평가 리베카 솔닛을 통해 최악으로 치닫는 세상 속에서도 희망을 말하는 용기를 배웠고, 신경학자 로버트 새폴스키를 통해 한 인간이 물려받은 어떤 조건이 그의 인생을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걸 믿게 됐죠. 그러다 알았어요.
글은 쓴 사람을 고스란히 담게 되는구나, 번역도 다르지 않겠다. 좋은 번역을 하기 위해선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기술을 갈고닦는 것을 넘어, 인격을 수련하는 과정이 번역이란 일 안에 있었다. 오롯이 그것에 집중하려면 바깥의 것들은 덜어낼수록, 심플할수록 좋았다.
베테랑의 루틴 :
다른 책에 한눈팔기
매일 아침 책상 앞에 앉으면 그날 새롭게 출간된 책들의 목록을 샅샅이 읽는다. 25년째 변치 않은 일과의 첫 번째 루틴이다.
하루 평균 약 200권 정도. 그의 전문 분야인 과학책은 물론이고 문학, 에세이, 논픽션, 자기계발서, 요리책, 어린이책, 수험서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살핀다.
“저자, 번역자, 출판사, 간단한 소개 정도만 읽고 넘어가도 아예 안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요. 이 시장을 조망할 수 있는 눈을 갖게 되거든요. 내가 번역할 책이 이 넓은 시장에서 어떤 위치와 어떤 자리를 갖게 될지 가늠하는 과정이기도 하고요.”
수십 년을 반복한 이유가 있다. 좋은 번역은 ‘다른 책에 대한 지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제가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책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도 ‘남의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아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죠.
텍스트는 큰 언어 생태계 속에서, 또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니게 돼요. 그렇기 때문에 한 텍스트의 진의를 알기 위해선, 당연히 그 텍스트의 바깥도 알아야 해요.
그래야 이 저자의 말이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인지, 아니면 누구나 해왔던 이야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인지 파악할 수 있죠. 이 두 개는 완전히 달라요. 그리고 번역자는 그걸 알아야 하죠.
자기 책에만 흠뻑 빠져있으면, 그 책이 세상에서 최고가 돼요. ‘이렇게 열심히 노력해 옮겼는데, 당연히 베스트셀러가 되어야지’라고 생각하게 되고. 판매량이 안 좋으면 ‘왜 못 알아봐 줘?’ 하는 억울한 마음이 들죠.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 거예요.
자기 책의 장점뿐 아니라 한계까지도 제대로 알 수 있어야, 그 책에 걸맞은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어요. 그래서 책의 세계를 항상 주시하고 있어야 하는 거예요.”
출판사에서 의뢰해오는 번역 검토는 가리지 않고 받는다. 편집자가 직접 고른 원서를 받아 읽어보고, 출간해도 될 만한 책인지, 번역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인지 전문가로서 자문하는 일이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갈 때도 많다. ‘이건 한국에서 절대 안 팔릴 책이다’라고 단언했던 책이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하고, ‘국내 독자들에겐 지나치게 어려운 책’이라 걱정했던 책이 청소년들에게까지 읽히기도 한다.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훈련이다.
더 적극적으로 다른 책에 한눈을 팔기 위한 ‘강제 장치’는 더 있다. 매체에 ‘이달의 과학책’을 추천하는 서평을 쓰거나, 출판사가 운영하는 북카페에 특별히 편애하는 책들을 전시한다. 책임을 동반하지 않으면 꾸준히 지속하기 어렵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뇌에 힘을 꽉 주고 하는 일”이 있다. 흠모하는 번역가들의 작업물을 찾아 읽는 것이다. 한 명의 독자로서는 가슴이 두근거리지만, 업계의 경쟁자로서는 온몸의 신경이 바짝 긴장되는 시간이다.
“번역을 전업으로 한 지 2년 정도 됐을 때, 존경하던 고참 번역가를 만날 일이 있었어요. 저를 번역가로 소개하니 그분이 깜짝 놀라면서 ‘설마 나랑 같은 언어를 번역하는 건 아니죠?’라고 되묻더라고요. 아니라고 대답하니, 돌아온 대답이 뇌리에 꽂혔죠. “다행이다. 경쟁자가 많아지면 힘들어.”
번역자들은 전부 프리랜서고, 서로가 경쟁자니까 이해는 돼요. 하지만 절대 그렇게 되고 싶진 않았죠.
전 다른 사람의 번역을 좋아하는 힘이야말로, 제가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밀어주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대체 어떻게 이렇게 잘한 거야.’ 감탄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민이 생겨요.
‘난 어떻게 다르게 할 수 있을까.’”
뛰어난 동료들의 번역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기고 싶은 마음이 강한 사람일수록 다른 이의 걸작을 제대로 보는 게 힘든 법이니까.
“괴롭죠. 근데 하다 보면 능숙해져요. 처음엔 나한테 화가 나요. ‘남들은 이렇게 잘하는데 내 번역은 왜 이렇게 개떡같은 거야.’ 그럴 때 하룻밤만 자고 나면 기분이 조금 나아지거든요. (웃음)
그때부턴 자책하는 게 아니라 ‘나만 할 수 있는 내 방식은 뭘까’를 고민하는 거죠. 저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진짜 내 자신감이 생겼어요.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을 때, 리듬감이 느껴진다는 게 제 번역의 장점이라는 것도 알게 됐고요.”
이제는 안다. 남들 좋다는 큰 상을 받았어도, 세계적인 과학자의 책을 수십만 부씩 팔았어도, 과거의 이력이 영원한 내공을 만들어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중요한 건 바로 지금 ‘현재의 자신감’이다.
믿고 읽는 번역가,
‘김명남’ 댓글 모음
베테랑의 시간 :
꾸준함의 고원으로 가는 길
자신감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던 시절도 있었다. 최근 일이다. 흔히 말하는 슬럼프였다.
가장 깊은 저점을 찍었던 것은 4년 전, ‘어쩌면 일을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비관에 사로잡혀 지냈다. 2019년까지 꾸준히 8, 9권을 기록하던 연간 출간 권수 역시 2020년을 기점으로 2, 3권으로 떨어졌다.
“작업량이 정확히 반으로 줄기 시작했던 게 그때쯤이었을 거예요.
부모님이 쓰러지시면서 비혼 장녀인 제가 간병을 해야 했고, 더 이상 30대에 정한 규율에 따라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깎였죠. ‘이만큼은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던 작업량을 맞추지 못하면서 마감도 줄줄이 밀렸어요.
출판사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니 자괴감이 밀려오고, 내 작업물을 보면 완전히 난장판인 것 같고. 나중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보다 번역을 잘하는 사람은 이미 너무 많은데, 나 하나쯤 여기서 빠진다고 대수일까?”
한번 시작된 자기 의심은 내면에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혼자선 이 연쇄 작용을 멈출 수 없었다.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했죠. 주치의 선생님이 그러더군요.
‘과거의 방법을 벗어나세요. 더 이상 통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주말도 없이 매일 12시간씩 일하던 게 과거의 방식이었어요. 1년에 9권씩 책을 내던 시절이죠. 몸이 따라주질 않는데, 하던 대로 하지 않으니 이상한 거예요.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는 나를 보면 꼭 엉망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죠.
내 몸이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내가 처한 상황 역시 마찬가지라는 걸 인정해야 했어요. 내 삶이 바뀌었으니, 내 일의 리듬도 달라져야 한다고. 가장 먼저 시간을 쓰는 방법부터 바꿔야 했죠.”
오직 양질의 번역만을 위해 쓰던 시간을, 자기 돌봄에 할애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도보 30분 거리인 공유 오피스를 계약했다. 매일 출·퇴근을 핑계로라도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오전엔 햇살을 받으며 걷고, 밤엔 밤바람을 맞으면서 걸었다. 그것만으로도 무기력증이 한결 나아졌다.
작업 시간도 줄였다. 하루 8KMN(8시간)을 넘지 않는다는 새로운 원칙이 생겼다. 그는 40분 일하고 20분 쉬는 1시간 단위 사이클을 자신의 이니셜을 따 1KMN이라 부른다.
일의 진척이 더뎌 답답할 때엔 4KMN으로 줄였고, 몸이나 마음이 많이 아픈 날엔 애쓰지 않고 2KMN만 했다. 연간 목표도 다시 설정했다. 3개월에 1권씩 1년에 4권씩 번역한다는 게 바뀐 기준이다.
그의 작업일지
이런 시간을 보내며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떠돌아다니는 ‘더닝 크루거 효과’라는 그래프가 있어요. 진위 여부가 확실치 않아 밈(meme)처럼 회자되는 이미지인데, 볼 때마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해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지식이 쌓이면 금세 자신감이 올라 ‘우매함의 봉우리’를 찍어요. 자신이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상태죠. 한번 고점을 찍고 나면 바로 ‘절망의 계곡’에 빠져요. 주제 파악을 하게 되는 시기죠.
저도 그랬어요. 전업 번역가 생활을 시작한 지 8년 만에 한국일보가 주는 한국출판문화상(번역 부문)을 수상했을 땐, 자신감이 하늘을 찔렸죠. ‘난 이제 기술도 알고, 요령도 알고, 뭐가 좋은 문장인지도 알아. 난 잘해’라고 자신했죠.
그런 자신감이 꺾이면서 보이는 게 달라졌어요. 내가 무엇에 약한지, 뭘 못하는지, 왜 자신이 없는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거예요.”
절망의 계곡에서 보낸 시간이 자신을 타인처럼 볼 수 있게 만든 거다.
그가 말한 ‘더닝 크루거 효과’ 그래프에선 절망의 계곡을 찍고 난 다음, 완만하게 상승하는 ‘깨달음의 비탈길’이 있다. 그 언덕을 오르고 나면 ‘꾸준함의 고원’이라는 구간이 나온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높은 곳에 평탄하게 형성된 고원, 봉우리나 골짜기가 없는 평화로운 곳”이다.
“슬럼프를 지나면서 내 인생에도 그런 곳, 그러니까 지속가능한 고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그만두면 영영 만날 수 없을 테니.”
지금은 믿는다. 지금껏 쌓아왔던 시간, 또 앞으로 쌓아갈 시간이 언젠간 자신을 그 고원에 데려다줄 것이라고.
베테랑의 한 끗 :
내가 옮긴 5만쪽의 문장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확신
당신을 베테랑으로 만든 ‘한 끗’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내가 번역하는 모든 문장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확신이요.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모르는 걸 대충 아는 척하고 옮긴 적은 없어요. 번역을 끝내고 난 직후엔, 그 책을 쓴 저자보다 그 책을 더 잘 안다고 느껴요.”
인터뷰 내내 신중하게, 또 조심스럽게 단어를 골라왔던 그가 한끗을 묻는 질문에 처음으로 ‘확신’이라는 단어를 꺼내 들었다.
구석구석 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번역을 하다 보면 저자 자신도 잘 모르고 쓴 것 같은 문장을 만날 때가 있어요. 자기만의 관성으로 일반적이지 않은 표현을 썼거나,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사실을 사실인 양 자신 있게 썼거나.
그 모호함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는 거죠. 저자가 이전에 썼던 책을 참고하든, 관련 분야의 다른 자료를 조사하든 저만의 방식으로 충실하게 답을 도출해요. 누군가 제 번역을 보고 몇 페이지의 몇 번째 문장을 왜 이렇게 옮겼냐고 물으면, 바로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일까. 자신이 직접 쓴 문장은 기억을 못 해도, 지금까지 출간한 120권에서 자신이 번역한 문장은 빠짐없이 기억한다. 발췌된 문장만 보고도, 어느 책의 어떤 대목인지 바로 맞힐 수 있을 정도다. 한 문장, 한 어절, 한 단어까지 철저했단 뜻이다.
나의 번역 일지
그가 번역한 문장은 무엇이 다를까? 어떤 고민들이 담겨있을까? 김명남 번역가가 직접 보내온 ‘역자 코멘터리’를 살펴보자.
영문 카드 위에 마우스를 올려보시면
김명남 번역가가 옮긴 문장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영문 카드 위를 클릭하시면
김명남 번역가가 옮긴 문장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ZERO, all by itself, is nothing.
Can you imagine nothing?
Octopuses have ZERO
bones.
With no bones, octopuses can squeeze through very small spaces.
Anne Richardson, Andrea Antinori (2022) pp. 2~4
“0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닌 수예요.
아무것도 아닌 수를 상상할 수 있나요?
문어 뼈는 0개예요.
뼈가 없기 때문에 아주 좁은 공간에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어요.”
앤 리처드슨 글, 안드레아 안티노리 그림, 봄볕 (2024년) 2~4쪽
어린이 그림책은 워낙 짧으니 번역하기 쉽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오히려 더 어려울 때가 많아요.
쉬운 단어를 선택하면서, 정확하게 사실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죠. “문어 뼈는 0개예요”라는 문장은 사실 우리말로는 좀 어색해요. 하지만 ‘일부러’ 그렇게 쓴 것입니다.
이 책은 숫자 그림책이에요. 0이라는 숫자의 개념을 설명하는 책이죠. 그래서 “문어에겐 뼈가 없어요” 하는 식이 아니라 “문어 뼈는 0개예요”라고 표현한 거죠. ‘Nothing’이라는 표현을 ‘아무것도 아닌 수’라고 번역하기까지 고민도 많았죠.
로버트 새폴스키는 과학책을 쓰면서도 장난기 가득한 문장을 자주 구사해요.
진화생물학의 신이라고도 불리는 에른스트 마이어를 두고 "inspirational guy"라고 부른 것도 장난이에요. 이 장난기 어린 표현을 어떻게 옮길까 고민했죠. ‘guy’를 여느 때처럼 ‘녀석’이나 ‘친구’라고 옮기기는 어색하고, 그렇다고 ‘사람’이나 ‘분’이라고 옮기면 딱딱해지잖아요? 생각 끝에 "영감님"이라고 옮겼습니다.
그러면서 "영감을 주는 영감님"이라는 말장난으로 만들었죠. 저자의 장난기를 꼭 살려내고 싶었거든요.
The importance of founder populations was something championed by one of the giants of evolutionary biology, Ernst Mayr of Harvard. (…) Remarkably, Mayr published four well-received books when he was over age ninety, the last one (What Makes Biology Unique?) in 2004 at age one hundred, shortly before his death. Inspirational guy, for a bunch of reasons.
Robert M. Sapolsky (2017) p. 354
창시자 집단의 중요성을 가장 강조한 사람은 진화생물학의 거인으로 꼽히는 하버드의 에른스트 마이어였다.
(…) 마이어는 놀랍게도 90세 이후에 책을 네 권이나 썼고, 모두 호평받았다. 그는 마지막 책 『생물학은 왜 독특한가?』를 100세였던 2004년에 썼고, 몇 달 뒤에 죽었다.
여러모로 영감을 주는 영감님이었다.
로버트 M. 새폴스키, 문학동네 (2023년) 432쪽
“Despite everything” suggests the forces that try to stop a person or change her nature and purpose, and “who you were meant to be” suggests that those forces did not altogether succeed. It was a lovely fortune to be handed by a stranger, and I took it, and with it the sense that who I was meant to be was a breaker of some stories and a maker of others, a tracer of the cracks and sometimes a repair-woman, and sometimes a porter or even a vessel for the most precious cargo you can carry, the stories waiting to be told, and the stories that set us free.
Rebecca Solnit (2020) p. 239
““우여곡절이 있었겠지만”, 이 말은 한 사람을 저지하려고 들거나 그의 성품과 목적을 바꾸려고 드는 힘들이 있음을 뜻하고, “운명대로 산다”, 이 말은 그 힘들이 완벽히 성공하지는 못했음을 뜻한다.
그것은 낯선 이가 내게 건넨 멋진 운이었다. 나는 그 운을 받아들였고, 더불어 내 운명은 어떤 이야기를 깨뜨리는 사람이자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 금간 곳을 추적하는 사람이 되는 것,
가끔은 수선하는 사람이 되는 것, 또 가끔은 가장 귀중한 화물을 담아 나르는 짐꾼 혹은 배가 되는 것이라는 느낌도 함께 받아들였으니, 그 화물이란 말해지기를 기다리는 이야기들, 우리를 자유롭게 할 이야기들이다."
리베카 솔닛, 창비 (2022년) 302~303쪽
“Despite everything”을 “우여곡절이 있었겠지만”으로, “who you were meant to be”를 “운명대로 산다”로 옮기는 것이 너무 지나친 해석은 아닐지 많이 고민했어요.
하지만 직역한 그대로 “이런저런 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되기로 예정된 존재” 정도로 옮겨서는 도저히 그 느낌을 살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솔닛은 이 말들을 자기 삶의 ‘선물’로 느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거든요.
또 이것은 책의 가장 마지막 문장이에요. 그래서 좀 길고 복잡하더라도 솔닛의 생각의 흐름을 고스란히 살릴 수 있도록, 영어의 문장 순서 그대로 번역했어요. 그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할 이야기들”이라는 표현이 맨 끝에 옵니다.
철저함의 고삐를 바짝 틀어쥐어 왔던 이유가 있다. 그가 ‘최후의 보루’로 여겨온 숨겨진 원칙 때문이다. ‘DO NO HARM’, 세상에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원칙이다.
“책 번역하는 사람이 세상에 끼칠 수 있는 해가 뭐가 있겠느냐, 의아하실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책도 세상에 해를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이 원칙에 따라 좋은 조건으로 의뢰가 들어와도 거절하는 책이 있어요. 근거 없는 주장을 그럴듯하게 설파하는 건강서라든가, 유사과학을 과학으로 둔갑시킨 책들이죠.”
당연해야 할 원칙이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는 세상 속에서, 그가 확신을 가지고 조용히 지켜온 소신이자 도리다.
내가 하는 일이 지닌 영향을 확신해야 지킬 수 있는 소신이군요.
"내 일이 나뿐 아니라, 세상 속에서 의미를 갖기를 바라는 마음은 계속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마음을 갖고서 번역을 하는 것과, 그런 마음 없이 번역을 하는 건 다르거든요.
늦은 밤, 문득 곰곰이 내 일의 의미를 헤아려 볼 때가 있어요. ‘내 책의 독자 100명 중에 99명이 딱 한 번 읽고 모든 것을 잊어버린대도, 단 한 명의 삶을 조금이라도 움직였다면 그것으로도 족하다.’
전 그 의미를 확신해요. 그렇기 때문에, 이 일의 외적인 조건이 아무리 흔들려도 ‘계속해도 될까’라는 의심은 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매일 같은 마음으로 책을 고른다.
자신을 공명한 책이 세상과도 공명하기를 바라는 마음. 이 마음이야말로 베테랑 김명남의 숨겨진 한끗이 아닐까.
중요한 건 바로 지금
‘현재의 자신감’이니까
Editor's Note
베테랑 번역가 김명남의 인터뷰, 재밌게 읽으셨나요?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많아요. 그와 녹음기 바깥에서 나눈 대화를 7월 18일 자 커리업 뉴스레터에서 독점으로 공개합니다. 비하인드 에피소드를 놓치지 않으려면? 아래 버튼을 눌러 지금 바로, 레터를 구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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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Chapter1. 베테랑의 도구 : 덜어내기, 덜어내기, 또 덜어내기
- Chapter2. 베테랑의 루틴 : 다른 책에 한눈팔기
- Chapter3. 베테랑의 시간 : 꾸준함의 고원으로 가는 길
- Chapter4. 베테랑의 한 끗 : 내가 옮긴 5만쪽의 문장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