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구교환에게 치마 입힌 이 스타일리스트, “몸만 들어가면, 여자 옷도 입어본다”
스타일리스트 박선용 - 박선용 베테랑
베테랑의 한끗 vol.9
배우 구교환에게 치마 입힌 이 스타일리스트,
“몸만 들어가면, 여자 옷도 입어본다”
2024년 9월 13일
잠깐! 이 페이지는 한국일보 커리업 연재물 ‘베테랑의 한 끗’ 전용 화면입니다. 오디오와 고화질 사진이 어우러져 제공되는 특별한 기사를 만나보세요.
“‘지금이 나의 마지막 정점’이란 생각을 매일 해요.
그러면 한순간도 허투루 보낼 수 없어요.”
무대에서 그 스타일은 빛이 났다.
광택이 도는 새틴 재킷에 같은 소재의 랩스커트, 반짝이는 에나멜 구두와 목걸이까지. 이런 차림을 소화한 그가 여성이 아닌 남성 배우라 더 화제가 됐다. 지난 7월 영화 ‘탈주’의 무대 인사 때 배우 구교환이다. 성별의 경계를 허문 ‘젠더리스 룩’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지 오래. 그래서 이런 질문도 늘 따라붙는다. “대체 스타일리스트가 누구야?”
연기만큼 인기를 끄는 그 스타일 뒤엔 이 베테랑이 있었다. 11년 차 스타일리스트 박선용(36)씨다. 2019년부터 함께해 온 그에게 배우 구교환은 이렇게 신뢰를 표현한다. “실장님이 고른 건 다 좋아요.” 전적으로 믿는다는 뜻이다.
그는 배우 장나라·이준기의 전담 스타일리스트이기도 하다.
드라마 ‘VIP’(2019)부터 현재 방영 중인 ‘굿파트너’까지 눈길을 끌었던 장나라의 슈트도 그의 손길이 닿은 스타일링이다. 감각 좋은 그를 두고 사람들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종종 말한다. “타고났나 봐요!”
어시스턴트(보조) 스타일리스트(통상 ‘어시’라고 부른다)로 처음 업계에 발을 내디뎠던 2010년을 떠올리며 그는 손사래를 친다. “소질 없으니 다른 일 알아보라는 말을 밥 먹듯 들었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한눈을 팔았더라면 지금의 스타일리스트 박선용은 없을 테다.
“체면도 자존심도 버린 시간, 그래서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폼 안 나던’ 발버둥의 시간”을 버텼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저 자신을 베테랑으로 만든 건 재능이 아니라, 타고난 게 없다는 사실 그 자체였어요.”
베테랑의 도구 :
기상천외 소장품
옷으로 만든 동굴. 서울 강남구 신사동 로데오거리에 있는 그의 작업실이 그랬다. 105㎡(32평) 남짓한 공간엔 옷이 가득 걸린 2단 행거로 둘러싸였다. 바닥도 곳곳이 옷 더미. 옷이 가득 담긴 100L짜리 비닐 봉투들이었다. 협찬사에서 받아오거나 반납해야 할 것들이다.
옷으로 발 디딜 틈이 없는 그 공간에 이질적인 물건들이 있었다. 다 망가진 것처럼 보이는 영상용 필름 카메라, 예스러운 자수 베개, 복싱 챔피언 벨트…. 이뿐만이 아니다. 수산물 직판장에서 볼 법한 빨간 고무장갑, 용접공들이 쓰는 용접 장갑, 목공소에서 흔히 보는 목공 장갑, 50년 전 하키 선수들이 쓰던 글러브까지. 스타일리스트의 작업실에 왜 이런 물건이 있을까.
“10년도 더 된 일인데 아직도 기억이 선명해요. 모델에게 준비해 간 옷을 다 입혔는데도 뭔가 심심해 보이는 거예요. 초조했죠. ‘저 위에 뭐라도 더 입혀야 하나. 아니면 액세서리를 추가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사진작가가 먹다 남은 콜라병을 가리키는 거예요. ‘저기다 빨대 꽂아서 가져와 보세요’라면서. 그걸 모델 손에 들려주니 그림 전체가 드라마틱하게 바뀌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어요. 스타일링을 ‘옷 입히는 일’이라는 범주에만 가두면 안 되겠다고.”
희귀한 잡동사니들을 사기 시작했다. ‘패션 아이템이 아닌 것들도 얼마든지 패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화룡점정의 한 끗을 만드는 그만의 ‘스타일링 치트키’다.
“최근 김성철 배우가 화보에서 착용한 연두색 헤드셋은 1990년대 제품이에요.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에 꽂아 쓰던 것이죠. 몇 년 전 동묘시장을 뒤지다가 구했어요. ‘화보 찍을 때 요긴하게 쓰지 않을까’ 싶어서요. 이런 소품이 모자나 헤어밴드로는 낼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죠.”
그의 작업실엔 2차 세계대전 때 쓰였다는 군용 헬멧도 있다. 군데군데 삭은 데다 곰팡이 냄새까지 나는 이 헬멧도 훌륭한 패션 아이템이다. 배우 구교환이 주연을 맡은 넷플릭스 시리즈 ‘D.P.’ 공개를 앞두고 찍은 화보에 활용했다.
“그건 2차 세계대전 당시 탱크 전차병들이 쓰던 헬멧인데요. 잡지사에서 보내준 콘셉트 시안을 받자마자 아이디어를 떠올리곤 빈티지 군장점으로 달려갔어요. 어렵게 구했죠. 콘셉트가 밀리터리 룩이었거든요. 흔한 아이템을 쓰기 싫었어요. 오직 이 화보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을 만들려면 남다른 아이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스타일리스트의 일은 패션 브랜드의 광고나 패션 잡지의 화보, 연예인의 무대 스타일링, 배우의 작품 속 캐릭터 스타일링까지 다양하다.
스타일리스트마다 주특기로 꼽는 분야가 제각각이만, 그가 자신의 뿌리로 여기는 건 패션 화보다. 세 가지 일 중 가장 돈이 안 되는 일이라는데도 자신의 정체성처럼 여기는 이유는 뭘까.
“프리랜서 스타일리스트로 명함을 판 뒤 가장 먼저 덤빈 일이 잡지 화보였어요. 창조성과 예술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됐어요. 그래서 열심히 했고, 결과적으로 저를 키워준 일이 됐죠. 지금도 자존심을 걸고 해요.”
패션 화보는 브랜드와 잡지 에디터, 사진작가, 스타일리스트가 협업해 만드는 지면 예술이다. 패션업계의 내로라하는 프로 스타일리스트들이 이름을 걸고 경쟁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결과물이 예전만 못하면 “그 사람, 감이 다 죽었던데”라는 소문도 순식간에 퍼진다. ‘감 떨어진’ 스타일리스트의 자리를 대체할 스타일리스트는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냉정하다.
그와 10년째 화보 작업을 해온 패션 잡지 ‘에스콰이어’의 오성윤 에디터는 “박선용 스타일리스트처럼 10년 이상 부침 없이 자기 입지를 넓혀오기는 정말 쉽지 않다”고 말한다.
꾸준하게 새로움을 보여왔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꾸준한 새로움을 만드는 그만의 도구는 패션과는 연결 짓기 어려운 소장품들이었다.
마우스로 스와이프해보세요
사진을 스와이프해보세요
김도훈, 구교환과 함께 한 패션 화보들 모아보자.
베테랑의 루틴 :
입어본다
지금이야 유명 연예인들의 소속사나 패션 잡지, 패션 브랜드의 러브콜을 두루 받는 톱스타일리스트지만, ‘어시’ 시절 그는 ‘가망 없는 열등생’이었다.
“스물세 살,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패션업계에 뛰어들었어요. 톱스타들만 전담하기로 이름나 있던 업계 최고 스타일리스트 선배의 밑에 ‘어시’로 들어갔죠.
스타일리스트는 전형적인 도제식 시스템으로 길러져요. 통상 ‘어시’로 5년에서 8년까지 일하다가 독립하곤 하죠. 개인 사업자이자 프리랜서가 되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그런 수련 기간을 거치지 않으면 업계에 공식적으로 데뷔할 수가 없었어요.”
‘어시’로 일했던 첫해 그의 연봉(월급이 아니다)은 180만 원. 그것도 반년은 무급이었고, 7개월째에야 첫 월급으로 30만 원을 받았다.
“일을 한다기보다 일하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란 마음으로 버텼어요. 가끔 잡지 한 페이지 구석에 제 이름이 실릴 땐 얼마나 짜릿하던지.”
애석하게도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건 별개였다. ‘어시’로 5년을 일하며 그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감각이 없다’는 얘기였다. 한번은 동고동락하던 동료가 넌지시 물어오기도 했다. 지금이라도 이 일 말고 다른 일을 시도해 보는 게 어떠냐고.
“몸이 힘든 건 견딜 만했어요. 끝도 없는 자기 의심이 괴로웠죠. ‘넌 스타일리스트로 성공하기 어려울 거야’란 얘기를 정말 자주 들었거든요.”
이러다간 진짜 다른 일을 찾게 될 것 같았다. 그때 그가 시도한 방법은 닥치는 대로 옷을 입어보는 거였다. ‘몸으로라도 덤벼 감각을 기르자’는 생각이었다.
“타고난 감각이 부족하니까 다른 방식으로 단련해야 하잖아요? 펼쳐놓고 봐도 모르겠고, 마네킹에 걸쳐놓고 봐도 모르겠어서 입어보기 시작했어요. 옷의 형태, 셰이프(옷맵시), 핏감(몸에 감겨붙는 정도)이 어떤지 되도록 몸으로 체득하려고 한 거죠. 그래서 일단 몸이 들어가기만 하면 다 입어봤어요. 여자 옷까지도요.”
눈이 아닌 몸으로 옷을 공부한 시간이었다. 언제부턴가 지나가는 남자들의 허리춤만 쓱 봐도 사이즈를 맞출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스타일링에서 가장 중요한 핏에 대한 감각이 몸에 배기 시작한 거다. 지금은 자신과 신체 사이즈가 한참 다른 모델에게 옷을 입혔을 때 어떻게 보일지까지도 머릿속에 그려진다.
옷을 입어보다가 색다른 연출법이 나오기도 한다. 일본의 남성 싱어송라이터 후카세의 화보를 찍을 때다. 흰 바탕에 보라색 페인트가 뿌려진 듯한 무늬가 들어간 데님 소재의 재킷과 바지가 그날 의상이었다. 그는 바지 스타일링에 케이블 타이를 활용했다.
통 넓은 바지의 발목부터 종아리 부분까지 왼쪽은 세 군데, 오른쪽은 두 군데를 묶었다. 소매가 흘러내리는 걸 막는 슬리브 가터처럼 말이다. 전선 정리용으로 쓰이는 케이블 타이가 액세서리가 됐다. 덕분에 바짓단은 주름이 투박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잡혀 올라갔고, 의상과 매치한 까만 부츠가 멋스럽게 드러났다. 굽 높이가 16㎝에 달하는 여성용 부츠였다. 직접 바지통을 묶어 입으며 여러 종류의 신발을 신어본 뒤 결정한 착장이었다.
“옷을 입다 보면, 그냥 펼쳐놓고 볼 때는 떠오르지 않았던 별난 아이디어들이 툭툭 튀어나와요. 그렇게 탄력을 받으면 ‘아, 이거 된다’ 하는 확신도 바로 서고요.”
입어보는 루틴을 반복하다 보니, 착장의 완성도도 덩달아 올라갔다. 의상마다 입어보지 않고선 알아채기 어려운 디테일이 있으니 말이다.
“입고 벗는 일이 생각보다 참 힘들어요. 시간이 오래 걸리고요. 하지만, 저한텐 몸이 고생스러운 건 별문제가 아니었어요. 이 일이 간절했으니까.”
패션지 ‘엘르’의 이마루 에디터는 그를 두고 “한결같이 모든 의상을 입어보고 핏을 꼼꼼하게 체크해온다. 7년 전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성실함의 루틴이 그에게 준 열매는 이것이다. 몸에 쌓인 경험이 타고난 재능을 넘어설 수 있는 순간이 온다는 진실.
오늘도 그는 누군가에게 입힐 옷을 먼저 입고 거울을 보며 치밀하게 계산한다. 양쪽 소매는 손목이 얼마나 드러나 보이게 걷을지, 상의는 바지에 넣을지 뺄지, 넣는다면 어디를 얼마만큼 넣을지, 바지는 접어 올릴지 말지, 몇 번 접어 올릴지.
베테랑의 시간 :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라스트댄스’
그가 쌓아 올린 투박한 성실함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 자아를 만들어줬다. 어디서 누구를 만나건 “지금 업계에서 가장 잘하는 스타일리스트는 나다”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자신감.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현장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내뱉는 말이다. 방점은 ‘지금’에 찍혀있다. 지금은 그렇지만, 당장 내일이라도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스타일리스트는 일의 특성상 한 살이라도 어린 사람에게 유리하겠다고 느껴요.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니까."
그 역시 세월과 함께 밀려난 선배들의 기회를 빼앗으며 지금에 이르렀다. 직업적 수명도 짧은 편이다. 그러니 성공할수록 극도의 초조함을 느끼는 동료도 많다.
“모두가 두려워해요. 이걸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어떤 스타일리스트들은 자기 밑에서 고생한 ‘어시’들을 일부러 독립시키지 않고 주저앉히기도 하죠. 언젠가는 나를 잡아먹을 경쟁자가 될 게 뻔하니까.”
그렇게 되긴 싫었다. 그래서 시간에 대한 관점을 바꾸기로 했다.
“지금이 나의 마지막 정점이란 생각을 매일 해요. 오늘이 내 커리어의 최고점이고, 당장 내일부턴 끝없는 내리막이 시작될 수 있다고 수시로 각오하는 거죠. 그러면 한순간도 허투루 보낼 수 없어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잖아요. 그러니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죠.”
먼 미래를 볼수록 불안해지니, 그럴 바에야 현재를 보자는 생각이다. 그는 그래서 시간을 짧은 단위로 쪼개 현재에 전력을 다한다. 목표는 단순해지고 성과는 확실해진다. 절로 자신이 갱신됐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내년이 올해보다 나을 거란 막연한 기대를 하지 않는 것. 그 기대를 버리기 위해 자기 손으로 먼저 후배들에게 일을 떼어 준다. 이름값이 쌓이기만 하면 애쓰지 않아도 따라오는 달콤한 조건들을 자기 손으로 도려내는 일이기도 하다.
“작년 한 해 동안 제 밑에서 일하던 후배 2명을 독립시켰어요. 독립하기 1년 전부턴 제가 하는 일을 쪼개서 나눠주죠. ‘네 이름을 걸고 해보라’고. 작은 일들은 처음부터 진두지휘하게 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해서 잘 해낸 일은 후배가 독립하면서 가져가도록 했어요.
클라이언트 입장에서도 단가가 높아진 저보다는 이제 막 독립하는 신진 스타일리스트를 선택하는 게 더 경제적이죠. 고객에게도 ‘부담 갖지 말고 우리 팀에 있던 스타일리스트를 쓰시라’고 해요. ‘요즘 보면 이 친구가 나보다 잘하는 것 같다’면서.”
그가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일을 후배들에게 나눠주면 정작 제 일이 줄잖아요. 그럼 반드시 새로운 일을 더 받아야 해요. 더 스케일이 큰 일, 더 새로운 일, 더 큰 도전이 될 수 있는 일에 손을 뻗치게 되거든요.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는 거죠.”
매일 한 소절씩 연장하며 ‘라스트 댄스’를 추는 셈이다. 언젠간 이 스테이지에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지쳐 쓰러질 때까지 출 작정이다.
베테랑의 한 끗 :
나를 끝장낼 것 같은 압력
당신을 ‘베테랑’으로 만든 한 끗은 무엇인가요.
“‘어시’ 시절, 마음이 힘들어서 도망쳐 본 적이 있었어요. 그렇게 산 반년이 인생 중에 가장 우울했던 시기죠. 어딜 가서 무엇을 배우든, 뭘 하든 ‘오늘도, 내일도, 10년 후에도 이걸 하고 있겠구나’ 상상하면 가슴이 옥죄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돌아갔죠. ‘내 인생에 다른 대안은 없다’는 마음으로. 패션계에서 큰 꿈을 이뤄보겠다는 열정이나 패기 같은 건 없었어요. 오히려 콤플렉스가 원동력이었죠. ‘난 이거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끝내 인정한 거니까.
돌아간 지 2년 만에 급히 독립을 해야 했는데, 제대로 자리를 잡기까지 3년이나 걸렸어요. 빚이 3,000만 원까지 쌓였었죠. 퀵 서비스 아르바이트도 뛰었어요. 그래도 그만둘 생각 같은 건 다신 안 했어요. 그러면서 알았어요. 사람에겐 감당하기 버거운 압력이 가해져야 그 압력에 대항할 강한 힘이 만들어지는구나. 그런 압력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아요.”
‘내 인생에 이 일 말고는 없다’는 확신은 언제 든 건가요.
“다른 일을 해보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았어요. 세상에 어떤 일이든 다 힘들 수밖에 없다는 걸. 다만 그중엔 자신이 견딜 수 있는 종류의 힘듦이 따로 있거든요. 저한테 그런 일은 패션이었어요. 그러니 설사 돈을 못 벌더라도, 끝내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나한텐 이 길뿐이다. 그런 압박에 떠밀려서 앞으로 걷게 된 거죠.”
그 과정이 주는 아드레날린을 즐기는 경지가 된 지금은 안다. 그런 압박이 일을 밀고 나가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엔진이라는 걸.
“지난해 처음으로 아이돌 그룹을 맡았어요. 그리고 올해는 영화 의상팀에 들어가게 됐죠. 제 손으로 새로운 압박을 만든 거예요. 스트레스받으니 밥맛부터 사라지더라고요. 6㎏이 쭉 빠졌어요. 신기한 건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재밌다는 거예요.
그렇게 열심히 뛰면서 꼭 다짐하는 게 있죠. ‘넘어지는 건 괜찮아. 하지만 일어날 땐 뭐라도 쥐고 일어서야 하는 거야.’ 여태까지 쭉 그래왔으니까.”
요즘 같은 세상엔 보기 드물어진 이런 독기, 삶에 가해진 압력에 비례해 키워온 끈기야말로 베테랑 박선용의 숨겨진 한 끗이 아닐까.
‘넘어지는 건 괜찮아.
하지만 일어날 땐 뭐라도 쥐고
일어서야 하는 거야.’
Editor's Note
베테랑 스타일리스트 박선용의 인터뷰, 재밌게 읽으셨나요?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많아요. 그와 녹음기 바깥에서 나눈 대화를 9월 26일 자 커리업 뉴스레터에서 독점으로 공개합니다. 비하인드 에피소드를 놓치지 않으려면? 아래 버튼을 눌러 지금 바로, 레터를 구독해 주세요.
기본모드
읽기모드
목차
- Chapter1. 베테랑의 도구 : 기상천외 소장품
- Chapter2. 베테랑의 루틴 : 입어본다
- Chapter3. 베테랑의 시간 :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라스트댄스’
- Chapter4. 베테랑의 한 끗 : 나를 끝장낼 것 같은 압력